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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회사원, 집에서는 엄마와 아내, 그리고 누구도 모르는 순간에는 킬러가 된다. 《유부녀 킬러》는 기발한 이중생활을 빌려 우리에게 묻는다.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나만의 삶’을 원하는 마음은 이기적인 것일까.
“엄마는 무슨 일을 해?”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유보나는 진짜 직업을 말할 수 없다.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는 그는 사실 사람을 죽인다. 정확히 말하면 극악한 범죄자를 처단하는 킬러 ‘킹피셔’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첫날부터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만나고, 회사의 영업 미팅처럼 임무를 수행한다. 쿠팡플레이 역시 이 작품을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직업을 가진 어느 워킹맘의 고군분투 워라밸 사수기”라고 소개한다. 설정만 놓고 보면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상할 만큼 현실적이다. 아침에는 아이를 챙기고, 회사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고, 퇴근 후에는 다시 엄마와 아내가 된다. 보나에게 킬러라는 극단적인 직업만 빼면 그의 하루는 수많은 워킹맘의 일상과 닮아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어는 ‘킬러’보다 오히려 ‘유부녀’인지도 모른다. 결혼한 순간에도 한 사람의 인생은 계속된다.

아이를 낳았다고 꿈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가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이름보다 ‘엄마’라는 역할을 먼저 바라볼 때가 많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그 역할들은 분명 소중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 역할들의 합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나 자신의 삶을 원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마음이 아니다. 보나가 3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현업으로 돌아간다는 설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복직은 단순히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한동안 ‘엄마’라는 역할에 집중했던 사람이 다시 자신이 잘하던 일과 만나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에 들어가는 일이다. 물론 보나의 직업은 평범하지 않다. 저격총을 들고 범죄자를 처단한다. 하지만 이 과장된 판타지 속에는 아주 현실적인 감정이 숨어 있다. 일을 잘하고 싶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이고 싶다. 남편과 좋은 관계를 지키고 싶다. 그리고 가끔은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 ‘나’이고 싶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쉽게 워라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균형은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일이 가족보다 중요하고, 어떤 날은 아이 때문에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한다. 보나 역시 아동 성범죄자의 출소 앞에서 임무와 아이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삶의 균형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능력이 아니라, 그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계속 결정하는 과정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유부녀 킬러》는 ‘완벽한 엄마’라는 환상을 조금씩 깨뜨린다. 좋은 엄마라고 해서 언제나 아이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아내라고 해서 모든 비밀과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직장인이라고 해서 가족을 희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다. 다만 하나의 삶 안에서 여러 역할을 동시에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한다. 회의 시간과 아이의 일정이 겹치고, 가족 행사를 깜빡하며, 일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실제로 보나 역시 ‘클라이언트의 제삿날’을 계획하다 자신의 시댁 제삿날을 뒤늦게 떠올린다. 킬러와 며느리라는 극단적인 대비가 웃음을 만들지만, 그 안에는 너무 많은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겪는 현실적인 피로가 있다.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부족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건네는 위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보나의 또 다른 문제는 남편 권태성이다. 태성은 탐사보도 기자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가 바로 자신이 추적해온 킬러 ‘킹피셔’라는 사실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이야기는 워킹맘의 고군분투를 넘어 부부의 신뢰에 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함께 살고, 매일 얼굴을 보고, 같은 침대에서 잠든다고 해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좋은 관계란 상대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영역에 들어갈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부부에게도 각자의 기억이 있고, 상처가 있고, 혼자 견뎌온 시간이 있다. 태성은 결국 아내의 비밀에 접근하고, 작품은 ‘진실을 알게 된 뒤에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종영 인터뷰에서 정준원 역시 태성을 킹피셔를 추적하는 기자인 동시에 아내의 비밀을 알게 된 뒤 그것을 감싸 안는 남편으로 설명했다. 이것이 《유부녀 킬러》에서 결혼을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이다. 사랑은 상대의 좋은 모습만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얼굴과 마주한 뒤에도 그 사람을 다시 이해해보려는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보나의 정의 역시 완벽하지 않다. 그는 법이 충분히 처벌하지 못한 범죄자를 자신의 방식으로 처단한다. 작품의 한 회차 제목이 “법은 완전하지 않아.”인 것도 이 세계가 가진 윤리적 딜레마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악인을 죽이는 사람은 정의로운가. 피해자의 분노를 대신 실행하면 그것은 정의가 되는가. 법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개인이 심판자가 되어도 되는가. 작품은 킹피셔를 통쾌한 영웅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무고한 피해자가 저격당하면서 킹피셔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모방범의 존재까지 등장한다. 한 사람의 신념이 사회의 규칙을 대신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까지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보나에게도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가족을 지키는 일도 그렇고, 누군가를 심판하는 일도 그렇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옳은 것은 언제나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결정을 하며 살아간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그 모든 이름을 잠시 내려놓은 한 사람으로서. 《유부녀 킬러》의 총구 끝에 있는 것은 결국 범죄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좋은 엄마는 이래야 한다.’ ‘좋은 아내는 이래야 한다.’ ‘직장에서는 이래야 한다.’ 우리를 끊임없이 규정해온 수많은 기준 역시 그곳에 놓여 있다. 완벽한 워라밸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모든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할 속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면서 나의 일을 사랑해도 된다. 아이를 소중히 여기면서 혼자 있고 싶은 날이 있어도 된다. 누군가의 아내이면서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닌 나 자신일 수 있다. 내 삶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고 해서, 그 안에서 ‘나’라는 사람이 퇴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