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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을 보는 여자와 귀신을 누구보다 무서워하는 남자.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 순간 시작되는 것은 영적인 사건만이 아니라, 혼자 견뎌온 삶을 함께 바라보는 관계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은 대개 따뜻하다. 위로가 필요할 때 손을 내밀고, 사랑하는 사람과 손가락을 맞잡으며, 두려운 순간에는 옆 사람의 손에서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오싹한 연애》의 천여리에게 접촉은 그렇게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그녀는 귀신을 볼 수 있고, 자신의 손이 닿은 사람에게도 그 세계를 보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까워지는 순간은 곧 자신의 공포를 그 사람에게 옮기는 일이 된다. 박은빈이 연기하는 천여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재력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홀로 바라보며 살아왔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에는 깊은 고립이 있다. 가까워지고 싶지만 가까워질수록 상대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결국 여리는 관계를 원하는 마음과 관계를 피해야 한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런 그녀 앞에 마강욱이 나타난다. 양세종이 연기하는 마강욱은 사건을 맡으면 끝까지 진실을 추적하는 에이스 검사다. 이성과 증거를 믿는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귀신을 몹시 무서워한다. 그런 강욱이 여리와 접촉한 뒤 자신이 평생 부정하거나 피하고 싶었던 세계를 직접 보게 된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을 때마다 사건의 단서를 발견하고, 결국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기묘한 공조를 시작한다. 이 설정이 재미있는 이유는 단순히 ‘귀신을 보는 여자와 귀신을 무서워하는 남자’라는 대비 때문만은 아니다. 《오싹한 연애》에서 귀신을 본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본다는 것과 닮아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른 사람이 쉽게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어린 시절의 상처일 수도 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외로움일 수도 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마음 안에는 자신만 보고 있는 ‘귀신’ 하나쯤 존재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핵심은 퇴마보다 이해에 가깝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좋은 모습만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혼자 보고 있던 두려움까지 함께 바라봐주는 일이 아닐까.


강욱은 여리를 만나면서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를 보게 된다. 가장 편한 선택은 도망치는 것이다. 여리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강욱은 떠나지 않는다. 실제로 극이 진행되면서 그는 귀신을 보게 됐음에도 여리를 외면하지 않고, 오랫동안 혼자 두려움을 견뎌온 그녀의 곁을 지킨다. 이 관계가 설레는 이유는 강욱이 여리의 공포를 없애주는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공포가 사라지지 않아도 그 옆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현실의 사랑도 비슷하다. 좋은 관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오래된 상처가 연애를 시작했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불안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갑자기 단단해지는 것도 아니다. 대신 달라지는 것이 있다. 혼자 견디던 것을 둘이 견딜 수 있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삶의 무게는 달라진다. 그래서 《오싹한 연애》에서 ‘손’은 중요한 상징처럼 읽힌다. 손을 잡으면 위험해진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게 되고, 상대의 세계에 끌려 들어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은 가장 가까워진다.


사랑 역시 그렇다. 누군가와 깊이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이전보다 행복해질 가능성만 얻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을 가능성도 함께 받아들인다. 상대의 불안과 가족 문제, 과거와 결핍까지 조금씩 내 삶 안으로 들어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손을 잡는다. 혼자 안전한 것보다 함께 불완전한 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옹성우가 연기하는 강민환이 들어오면서 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여리를 향한 강욱과 민환의 서로 다른 감정과 사랑 방식이 대비되면서 작품은 단순히 ‘누가 여리와 이어질 것인가’를 넘어 어떤 관계가 한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지 바라보게 한다. 이 작품에서 귀신은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과거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남긴 사연과 미제 사건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이 외면했던 진실과 연결된다. 여리와 강욱은 그 목소리를 따라가며 사건을 해결한다. 세상이 잊은 이야기를 누군가는 끝까지 들어야 비로소 한이 풀린다는 구조다. 그 점에서 《오싹한 연애》는 의외로 다정한 작품이다.


사라진 사람을 잊지 않고, 남겨진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 말하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귀신 이야기 밖에서도 유효한 문장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관계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 저럴까’라고 판단하기 전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해보는 마음이다. 어쩌면 그것이 공감의 시작이다. 《오싹한 연애》가 로맨틱 코미디와 오컬트, 미스터리 수사를 한데 섞으면서도 결국 따뜻하게 남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넷플릭스가 작품을 ‘정반대의 끌림’을 가진 로맨스로 소개하는 것처럼, 여리와 강욱은 서로 다른 두려움을 가진 채 상대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귀신까지 없애줄 수는 없다. 다만 함께 볼 수는 있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에도 손을 놓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구하는 것은 대단한 해결책이 아니라 “네가 보는 것을 나도 함께 보겠다”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오싹한 연애》는 그 사실을 가장 오싹하면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