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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 전시

깨지기 쉬운 마음을 사랑한다는 것 — 연극 〈유리동물원〉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과 그럼에도 서로를 놓지 못하는 가족, 유리처럼 연약한 마음에 관한 이야기

미디어2026. 10. 13
우리는 저마다 도망치고 싶은 현실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 책임, 가족의 기대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잠시라도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반드시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 무겁고, 그것을 감당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4년 초연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작품은 1930년대 미국 세인트루이스를 배경으로 어머니 아만다, 아들 톰, 딸 로라가 함께 살아가는 윙필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버지가 가족을 떠난 뒤 아만다는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톰은 창고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로라는 극심한 수줍음과 신체적 장애로 인해 세상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며 작은 유리 동물들을 돌보는 자신만의 세계에 머문다.

세 사람은 같은 집에서 살아가지만 서로 다른 현실을 견디고 있다. 아만다는 과거의 기억에, 톰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로라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작은 세계에 머문다.

가족이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서로가 얼마나 외로운지 가장 늦게 알아차리는 관계이기도 하다.


아만다의 사랑은 왜 자꾸 상처가 될까

아만다는 자녀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종종 자녀가 원하는 삶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형태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과거 남부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로라에게 안정적인 결혼을 기대하고, 톰에게는 가족을 책임지는 성실한 아들이 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아만다가 믿는 행복이 로라와 톰에게도 반드시 행복인 것은 아니다.

그의 행동을 단순히 이기적인 부모의 모습으로만 볼 수는 없다. 경제대공황이라는 시대적 불안 속에서 홀로 자녀를 키워야 했던 아만다에게 안정적인 미래는 절박한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에서 시작된 사랑은 쉽게 통제로 변한다. 상대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상대의 선택을 대신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결정할 수는 없다. 때로 사랑의 가장 어려운 형태는 상대가 나와 다른 삶을 선택하도록 허락하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유리동물원〉은 오늘날의 가족에게도 익숙한 질문을 던진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고, 자녀는 부모의 기대를 부담스러워한다. 서로를 위해 하는 말이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로라의 유리동물원,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안전한 우주

로라는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 동물들을 모은다. 그중에서도 유니콘은 특별한 존재다. 현실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상상의 동물이자, 다른 동물들과 조금 다른 모습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라는 자신의 신체적 차이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세상과의 관계를 어려워한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유리 동물들을 바라보는 일이 편안하다. 그에게 유리동물원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세상의 평가와 기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마다 세상을 견디는 속도는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순간일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로라의 이야기는 조용하고 연약한 사람도 자신의 속도로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톰의 직장 동료 짐이 집에 초대되면서 로라에게도 변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짐은 로라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격려한다. 두 사람이 함께 춤추는 과정에서 유리 유니콘의 뿔이 부러지는 장면은 작품의 중요한 상징이다.

유니콘은 뿔을 잃고 평범한 말과 비슷해진다. 이 변화는 로라가 세상과 가까워질 가능성을 암시하는 동시에, 누군가의 특별함이 사라지는 일은 과연 성장인지 질문하게 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반드시 남들과 똑같아지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세상과 만날 방법을 찾아가는 일이다.


톰은 가족을 떠났지만 정말 자유로워졌을까

톰은 가족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구두 창고에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현실은 그가 꿈꾸는 삶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시를 쓰고 모험을 꿈꾸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의 잔소리와 책임이 기다린다.

그의 갈등은 단순히 가족을 버리고 싶은 이기심으로 설명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지만,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책임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홀가분한 일이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떠나온 사람들을 평생 기억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유리동물원〉이 특별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톰의 기억을 통해 펼쳐진다는 데 있다. 작품은 객관적인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시간이 흐른 뒤 톰이 기억하는 가족의 모습을 무대에 불러낸다. 그래서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후회와 그리움, 죄책감이 뒤섞인 기억의 형태로 다가온다.

톰은 가족을 떠날 수 있었지만 기억까지 떠날 수는 없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오래전에 끝난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고, 이미 지나간 선택을 다시 생각하며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 있다.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

〈유리동물원〉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아만다는 과거의 영광을, 톰은 자유로운 미래를, 로라는 안전한 작은 세계를 붙잡는다. 그 환상은 현실을 외면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작품은 환상을 무조건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환상이 현실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필요로 하지만, 그 희망이 다른 사람의 삶을 통제하거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지켜주던 세계가 언젠가 우리를 가두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과 만날 용기를 찾는 일이다.

2026년 예술의전당 토월정통연극 〈유리동물원〉은 신유청 연출이 맡는다. 아만다 역에는 김성령·최정원, 톰 역에는 장승조·권율·김경남, 로라 역에는 정운선·정새별·임세미, 짐 역에는 문유강·최정우·배훈이 출연한다. 공연은 10월 17일부터 11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진행된다. 

2026년 10월 13일 현재 개막 전이므로 이번 시즌의 실제 관객 평가를 단정하기보다, 원작의 서사와 예술의전당의 공식 제작 정보를 중심으로 작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80여 년 전 쓰인 희곡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인간의 외로움과 가족의 갈등이 시대에 따라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기대를 부담스러워하고, 자신만의 공간에 숨고 싶어 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 뒤 후회한다.

그러나 〈유리동물원〉이 남기는 감정은 절망만이 아니다. 이 작품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관계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누군가의 마음이 유리처럼 깨지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조심스럽게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Blow out your candles, Laura.” “촛불을 꺼줘, 로라.”
이 문장은 작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짧지만 강렬한 대사다. 톰은 가족을 떠났지만 로라에 대한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촛불을 꺼달라는 말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면서, 동시에 끝내 잊을 수 없는 사람을 향한 애틋한 고백처럼 들린다. 우리가 누군가를 떠났다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때로 곁에 있을 때보다 떠난 뒤에 더 선명하게 남는다. 당신에게도 세상의 기대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을 지켜주었던, 작지만 소중한 ‘나만의 유리동물원’이 있나요?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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