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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 전시

밥 한 그릇에는 누군가의 사계절이 들어 있다 — 연극 〈쌀알의 노래〉

작은 볍씨에서 시작해 아버지의 노동과 딸의 기억으로 이어지는, 먹이고 키우는 사랑에 대하여

미디어2026. 09. 15
밥을 짓다가 쌀알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린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작아서 무심코 버리기도 하고, 다시 주워 담더라도 그 한 알을 오래 바라보지는 않는다. 〈쌀알의 노래〉는 바로 우리가 지나치던 그 작은 쌀알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은정은 딸 솔이와 밥을 준비하다 떨어뜨린 쌀알을 계기로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런데 단순히 과거의 자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은정 자신이 작은 볍씨가 되어 물에 잠기고 싹을 틔우며, 모판을 거쳐 논으로 옮겨지고, 가뭄과 장마와 폭우를 견딘 끝에 한 톨의 쌀이 되는 시간을 직접 살아간다. 

이 설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평범한 식탁을 거대한 시간의 결과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밥 한 공기는 너무 익숙해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지는 계절과 햇빛, 비와 흙, 그리고 논을 돌본 사람의 시간이 들어 있다. 작품 속 은정의 곁에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논을 살피고 물을 대며 잡초를 뽑는다. 수확과 타작을 거쳐 마침내 쌀알이 된 은정은 그제야 자신이 어린 시절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노동이 가족을 먹이고 키우는 사랑의 방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는 당연했던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누군가가 오랫동안 애써 당연하게 만들어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말과 감정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안아주며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모든 세대가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부모 세대의 사랑은 때로 설명보다 행동에 가까웠다.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하고, 자식이 먹을 것을 챙기고, 필요한 것을 마련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어린 자녀의 눈에는 그저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누군가를 돌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노동의 무게가 보이기 시작한다.



〈쌀알의 노래〉에서 은정이 ‘엄마’라는 현재의 자리에서 다시 ‘딸’이었던 과거로 돌아간다는 설정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는 부모를 처음부터 부모였던 사람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누군가의 딸과 아들이었던 시간이 있었다. 은정 역시 솔이를 키우는 엄마이면서 한때 아버지의 노동으로 자라난 딸이다. 작품은 아버지에서 은정으로, 다시 은정에서 솔이에게 이어지는 관계를 통해 돌봄이 세대를 건너 전달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부모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줄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그 사랑에서 배운 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며 살아간다.

이 작품에서 ‘쌀알’은 그래서 단순한 농작물이 아니다. 세대를 이어주는 기억의 매개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마련해준 밥을 먹었던 은정이 이제는 자신의 딸 솔이에게 밥을 준비한다. 식탁의 위치는 그대로지만 밥을 짓는 사람은 바뀌었다. 우리는 이렇게 어느 순간 돌봄을 받던 사람에서 돌보는 사람이 된다. 그제야 오래전 식탁 위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뒤늦게 이해한다.

하지만 〈쌀알의 노래〉가 가족의 사랑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볍씨가 된 은정이 통과하는 논에는 인간만 존재하지 않는다. 개구리와 우렁이, 물방개, 소금쟁이, 잠자리 등 다양한 생명들이 함께 계절을 살아간다. 작품은 논을 단순히 인간에게 쌀을 제공하는 생산시설로 바라보지 않고 여러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하나의 생태계로 그린다. 무대에서도 모내기와 김매기, 물꼬 트기, 수확과 타작의 동작을 배우들의 움직임과 장단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작품의 세계관은 가족에서 생명으로 넓어진다. 쌀 한 톨은 혼자 만들어질 수 없다. 볍씨가 있어야 하고 물과 흙, 햇빛이 필요하며 그것을 돌보는 사람과 논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이 필요하다. 우리가 먹는 한 끼 역시 수많은 존재가 연결된 결과다.



혼자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하루는 이미 수많은 생명과 사람의 노동 위에 놓여 있다.

이 사실은 어린이에게는 음식과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경험이 되고, 어른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잊고 있었던 감각을 되돌려준다. 마트에서 쌀 한 봉지를 구입하면 농사의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배달 앱을 누르면 음식이 집 앞까지 도착한다. 편리함은 삶을 바꿨지만 동시에 결과 뒤에 존재하는 과정을 쉽게 잊게 만들었다. 누가 심었고, 누가 길렀으며, 누가 운반하고 조리했는지는 완성된 상품 뒤로 사라진다.

〈쌀알의 노래〉는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을 다시 무대 앞으로 불러낸다. 한 톨의 쌀이 되기까지 사계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너무 쉽게 ‘결과’라고 부르는 것들의 뒤편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그것이 완성되기까지 보이지 않았던 시간을 한번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는 실패와 기다림도 있다. 볍씨를 심었다고 곧바로 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뭄을 지나야 하고 장마와 폭우도 견뎌야 한다. 사람의 노력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시간도 받아들여야 한다. 어린이극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 지점은 어른에게도 묘한 위로를 건넨다. 우리는 노력하면 빠르게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도, 일도, 관계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잘못되고 있다고 불안해한다. 하지만 벼는 오늘 물을 주었다고 내일 열매를 맺지 않는다.

자라고 있다는 사실과 아직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어떤 시기는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뿌리가 내려가고 있을 수도 있고, 다음 계절을 견딜 힘을 만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쌀 한 톨의 생애를 바라보는 일은 기다림의 가치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빨리 자라는 것보다 자신의 계절을 충분히 통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필요한 삶의 감각이다.

그리고 수확의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가 흔히 결실이라고 부르는 장면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결실은 혼자 이룬 성공이라기보다 함께 통과한 시간의 결과에 가깝다. 볍씨와 논, 계절과 생명, 아버지의 노동이 겹쳐야 비로소 쌀 한 톨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쌀은 다시 누군가의 밥이 되고 몸이 되어 다음 삶을 키운다. 끝처럼 보이는 수확이 또 다른 생명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쌀알의 이야기’가 아니라 ‘쌀알의 노래’라는 점도 아름답다. 노래는 혼자 부를 수도 있지만 여러 목소리가 겹칠 때 더 넓어진다. 아버지의 노동과 은정의 기억, 솔이의 현재, 논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의 시간이 서로 겹쳐 하나의 노래가 된다.

사랑은 특별한 날에만 증명되는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가 계속될 수 있도록 반복해온 작은 노동들의 합일지도 모른다.

결국 〈쌀알의 노래〉가 보여주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의 크기다. 손가락 사이에서 금세 사라질 수 있는 쌀 한 톨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사계절이 나타나고, 자연이 나타나고, 한 아버지의 등이 보이며, 그 사랑을 뒤늦게 이해하는 딸과 다시 다음 세대를 키우는 엄마가 보인다.

오늘 저녁에도 우리는 밥 한 그릇을 별일 없이 먹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지나고 나면 그 평범한 한 끼가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하루 뒤에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사랑받았다는 가장 오래된 증거는 어쩌면 기억 속의 거창한 말이 아니라, 매일 빠지지 않고 차려져 있던 한 그릇의 밥인지도 모른다.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나서야, 나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계절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쌀 한 톨이 만들어지는 시간을 직접 살아본 은정이 뒤늦게 아버지의 노동을 이해하듯, 우리 역시 사랑을 받은 바로 그 순간보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사랑의 크기를 알아차릴 때가 있다. 어쩌면 성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많이 아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랑을 다시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돌아보니 당연한 일상이 아니라 누군가가 오랫동안 당신을 위해 만들어주었던 사랑이었다고 느껴지는 기억이 있나요?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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