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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 전시

칼을 들었지만, 진짜 싸움은 마음속에서 시작됐다 — 뮤지컬 〈비더슈탄트〉

저항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가장 평범한 소년들이 자신의 신념을 선택하기까지

미디어2026. 09. 04
‘Widerstand’. 독일어로 ‘저항’을 뜻하는 단어다. 제목부터 이 작품은 자신이 어디를 향하는지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비더슈탄트〉가 흥미로운 것은 처음부터 용감한 저항군을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작품의 중심에는 그저 펜싱을 잘하고 싶었던 열일곱 살 매그너스 볼커가 있다. 1938년 독일, 매그너스는 가장 친한 친구 아벨 루터와 함께 최고의 펜싱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아이드 스포츠 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프레드릭, 하겐, 재스퍼를 만나고 경쟁과 훈련을 거치며 성장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믿었던 학교의 다른 얼굴을 발견한다. 학교의 비밀을 파헤친 소년들은 자신들만의 저항을 시작하고, 동시에 학교 최고 책임자 라인하르트 클레어는 매그너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설정에서 중요한 것은 매그너스가 처음부터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야심이 있고 승부욕이 강하며 인정받고 싶어 한다. 클레어는 바로 그 욕망을 알아본다. 과거 공연을 분석한 평에서도 클레어는 매그너스의 경쟁심과 인정 욕구를 자극하고, 더 높은 위치와 권력을 가져야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로 그를 끌어당기는 인물로 해석됐다. 악은 언제나 무서운 얼굴로 찾아오지 않는다. 때로는 “너는 특별하다”, “너에게 더 큰 기회를 주겠다”는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의 얼굴로 다가온다. 


 〈비더슈탄트〉가 보여주는 가장 위험한 권력은 사람을 억압하는 권력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믿게 만드는 권력이다.

그래서 매그너스의 갈등은 낯설지 않다. 정의가 무엇인지 몰라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을 선택했을 때 자신이 잃어야 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흔들린다. 꿈꿔왔던 성공, 인정, 안전,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힘까지. 현실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선과 악이 분명하게 표시된 갈림길 앞에 서지 않는다. 부당한 말을 들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침묵하거나, 조직의 잘못을 알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생각해 모른 척하기도 한다. 그때 우리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은 악의라기보다 두려움일 때가 많다.

 저항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두려움보다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결정한 사람의 행동이다.

작품에서 펜싱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펜싱은 단순히 소년들의 직업적 꿈이나 무대를 역동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에 그치지 않는다. 기존 공연에 대한 분석에서는 펜싱과 저항 운동을 관통하는 공통된 개념으로 ‘지킨다’는 행위가 지적됐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무고한 사람을 지키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 공격을 위한 칼과 방어를 위한 칼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윤리적 질문을 선명하게 만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칼을 들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들었느냐는 것이다. 

아벨은 그 질문을 가장 직접적으로 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폭력을 통해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가를 묻고, 차별과 억압이 당연한 질서로 변해가는 현실을 의심한다. 작품 속 아벨의 정체성과 당시 독일 사회에서 박해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저항을 추상적인 정의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끌어내린다. 누군가에게 정치와 이념은 토론할 수 있는 의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이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현실이다. 

이 때문에 〈비더슈탄트〉에서 우정은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선다. 매그너스와 아벨은 같은 꿈을 꾸며 학교에 들어왔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갈라진다. 한 사람은 힘을 얻어서 친구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힘 자체가 잘못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둘 다 상대를 지키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답이 다르다. 사랑이나 우정이 깊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가장 아픈 관계는 사랑하지 않아서 멀어진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지키고 싶었지만 지키는 방법이 달랐던 관계다.

프레드릭, 하겐, 재스퍼의 존재 역시 작품을 단순한 두 사람의 우정극에서 집단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저항은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혁명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의심하고, 다른 누군가가 기록을 발견하고,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면서 옆의 사람이 조금씩 움직인다. 반대로 억압 역시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불합리한 규칙 하나를 받아들이고, 차별적인 말을 침묵으로 넘기고, 누군가 사라졌을 때 이유를 묻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체제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침묵’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때로는 권력이 유지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된다. 모두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은 어느 순간 정상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1938년이라는 역사적 배경은 이 사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주지만 질문은 현재형이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순간을 경험한다.

 거대한 부정의는 언제나 거대한 악인 한 사람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의 작은 침묵이 그것을 오래 살아남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더슈탄트〉는 저항을 낭만적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옳은 선택에는 실제 대가가 따른다. 관계가 무너지고, 꿈이 흔들리며, 때로는 되돌릴 수 없는 상실까지 발생한다. 과거 공연에서 특히 주목받은 ‘보이지 않는 벽’의 무대 연출은 이런 균열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클레어의 세계와 저항하는 소년들의 세계 사이에서 매그너스가 경계에 놓이고,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서로 닿을 수 없는 인물들이 한 무대 위에 겹쳐진다. 



그 벽은 사실 우리 안에도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나와 안전하고 싶은 나, 친구를 지키고 싶은 나와 성공하고 싶은 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 하나쯤 침묵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 작품은 그중 하나를 간단히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그너스가 흔들리는 과정을 오래 보여줌으로써 저항을 영웅적 본능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로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비더슈탄트〉의 위로 역시 “용감해져라”라는 단순한 문장에 있지 않다. 사람은 흔들릴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자신이 믿었던 가치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차렸다면 다시 선택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신념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린 뒤에도 다시 자신이 믿는 방향을 선택하는 과정일 수 있다.

이 작품이 2022년 초연 당시 프리뷰 매진을 시작으로 연장 공연까지 이어졌고, 2023년 재연을 거쳐 2026년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초연 당시에는 펜싱과 저항 운동을 결합한 소재, 음악과 배우들의 에너지 등이 호평 요소로 거론됐다.  2026년에는 작·작사 정은비, 작곡 김드리, 연출 김태형, 음악감독 조윤화, 안무감독 이현정, 무술감독 서정주가 창작진으로 참여한다. 

이번 시즌의 매그너스 볼커는 최석진·한상훈·황순종, 아벨 루터는 박정원·이한솔·강병훈이 맡는다. 프레드릭 칼에는 김도현·김방언·김준식, 하겐 악스만에는 조모세·김지웅·황건우, 재스퍼 뮬러에는 김태환·최기정·김도민, 라인하르트 클레어에는 김보현·이형훈·고철순이 출연한다. 

현재 NOL 예매 페이지에서 작품은 평점 4.9를 기록하고 있으며, 9월 4일 기준 ‘뮤지컬 주간 1위’로 표시되고 있다. 공연은 7월 23일부터 10월 11일까지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1관에서 이어지며, 러닝타임은 인터미션 15분을 포함해 145분이다. 



하지만 결국 〈비더슈탄트〉에서 오래 남는 것은 나치 독일이라는 역사적 배경보다 그 시대를 통과해야 했던 소년들의 얼굴이다. 우리는 역사를 결과로 배운다. 누가 옳았는지, 어떤 체제가 잘못되었는지 이미 알고 객석에 앉는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미래의 정답지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정보와 두려움, 욕망과 관계 속에서 오늘의 선택을 해야 했다.

바로 그래서 이 작품의 질문은 과거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난 뒤 정의로운 사람을 칭찬하는 데 익숙하지만, 정작 결과를 알 수 없는 현재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아무도 내 편에 서지 않을 수도 있으며, 침묵하는 편이 훨씬 편한 순간에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신념은 마음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아무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 순간, 그 옳음을 행동으로 선택할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

〈비더슈탄트〉가 말하는 저항은 거창한 혁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갈 때 한 번쯤 이유를 묻는 것, 약한 사람을 향한 폭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것. 그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한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결정한다.

결국 매그너스가 겨누어야 했던 가장 어려운 상대는 펜싱 경기장 건너편의 선수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인정받고 싶은 자신, 안전하고 싶은 자신, 외면하고 싶은 자신과 싸우면서도 끝내 무엇을 지킬 것인지 결정해야 했던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때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저항은 영웅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아 잊지 않는 일이다.

“끝까지 살아내야 해.”
과거 시즌의 작품 분석에서도 아벨이 남기는 이 문장은 작품의 저항 정신을 압축하는 중요한 말로 다뤄졌다. 먼저 떠나는 사람이 남겨진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복수보다 ‘살아남는 것’이다. 죽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기억하고, 질문하고, 자신이 믿었던 것을 다음 선택으로 이어가는 것까지 포함하는 생존이다. 모두가 침묵하는 편이 안전한 순간에도, 당신이 끝까지 지키고 싶은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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