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 전시
이영훈의 노래를 따라 되감는 기억,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버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
누구에게나 노래 하나쯤에는 시간이 들어 있다. 전주 몇 초만 들어도 어느 계절의 공기와 함께 걷던 사람, 그날 입었던 옷과 거리의 냄새까지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돌아오는 노래. 음악이 기억보다 강력할 때가 있는 이유다. 〈광화문연가〉는 바로 그 경험을 무대의 문법으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고(故) 이영훈 작곡가의 ‘붉은 노을’, ‘옛사랑’, ‘소녀’, ‘깊은 밤을 날아서’,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애수’, ‘빗속에서’ 등 오랫동안 한국 대중음악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곡들을 한 사람의 생애와 연결한다. 2017년 초연한 CJ ENM의 창작 뮤지컬로, 2026년에는 다섯 번째 시즌을 맞는다. 이야기의 시작은 역설적으로 삶의 마지막이다. 작곡가 명우는 생을 떠나기 1분 전 병원 응급실이 아닌 낯선 ‘기억의 전시관’에서 눈을 뜬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인연을 관장하는 인연술사이자 기억을 되감아주는 월하. 월하는 명우에게 과거로 돌아갈 기회를 건넨다. 그렇게 명우는 자신의 스무 살로 향하고, 젊었던 자신과 첫사랑 수아를 다시 바라본다. 관객 역시 명우와 함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명우가 과거를 ‘다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자신의 청춘을 객석에 앉은 사람처럼 바라본다. 그때는 세상의 전부였던 사랑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이별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른 얼굴을 갖는다. 그 순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상대의 선택이 보이고, 자신이 얼마나 서툴렀는지도 알게 된다. 시간은 과거를 바꿔주지 않지만,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그래서 〈광화문연가〉에서 기억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공식 소개에서도 명우의 기억은 찬란하고 애틋하면서 동시에 부끄럽고, 때로는 ‘조작되기도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첫사랑도 실제 그 사람과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떤 장면은 사라지고 어떤 장면은 과장된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창고라기보다 현재의 내가 끊임없이 편집하는 영화에 가깝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과거는 실제로 존재했던 시간과, 지금의 내가 아름답게 편집한 시간이 겹쳐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첫사랑 수아가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수아는 단순히 명우가 놓쳐버린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명우의 젊음과 미완성된 가능성,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계절을 함께 상징한다. 우리는 첫사랑을 떠올리면서 사실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다. 아직 실패를 많이 경험하지 않았고 미래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 좋아한다는 감정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나. 그래서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큼 ‘그때의 나’에 대한 그리움이 들어 있다. 그 감정을 이영훈의 음악이 끌어낸다. ‘소녀’에는 처음 누군가를 좋아했던 마음의 조심스러움이 있고, ‘붉은 노을’에는 청춘의 뜨거운 에너지가 있으며, ‘옛사랑’에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야 말할 수 있는 쓸쓸함이 있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나 ‘빗속에서’를 듣고 있으면 특정한 사건보다 한 계절의 온도가 먼저 떠오른다. 〈광화문연가〉가 이 곡들을 단순한 히트곡 메들리로 사용하는 대신 명우의 생애에 배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래 하나가 기억 하나를 열고, 그 기억이 다시 다음 노래를 부른다.


좋은 노래는 시간을 설명하지 않는다. 몇 분 동안 우리를 그 시간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광화문연가〉가 첫사랑만 아름답게 추억했다면 꽤 익숙한 복고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작품에서 더 생각해볼 만한 지점은 명우의 현재 곁에 아내 시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명우에게 수아가 찬란했던 청춘의 기억이라면 시영은 오랜 세월 그의 현실을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수아를 향한 기억이 강렬하다고 해서 현재의 사랑이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의 마지막에서 과거를 모두 돌아본 뒤에야 명우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남아 있었던 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이루지 못한 사랑을 완성된 사랑보다 아름답게 기억한다. 함께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투지 않았고,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았으며, 서로의 지친 얼굴과 단점까지 견뎌야 할 필요도 없었다. 미완성된 관계에는 현실이 들어갈 공간이 적어서 기억 속에서 오래 아름답게 남는다. 반대로 오래 지속된 사랑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특별함을 잊기 쉽다. 첫사랑은 기억 속에서 아름다워지지만, 오래된 사랑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비로소 깊어진다. 그래서 명우의 시간여행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에서 조금씩 ‘지금까지 자신의 곁에 있었던 사람을 다시 발견하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에는 쉽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는 자주 잊는다. 떠난 사람의 말은 오래 기억하면서 오늘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은 흘려듣는다. 삶이 끝나는 순간에야 무엇이 소중했는지 깨닫는다는 설정은 익숙하지만, 바로 그 익숙함 때문에 아프다. 월하는 그런 명우에게 단순한 시간여행 가이드 이상의 존재다. 기억을 되감아주지만 과거를 수정해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만약 명우가 과거로 돌아가 선택을 바꿀 수 있었다면 작품은 ‘인생 2회차’ 판타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화문연가〉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목적은 후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후회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후회하지 않는 선택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없는 선택까지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작품의 세계관은 꽤 따뜻하다. 삶은 완벽하게 정리된 이야기가 아니며 사랑 역시 반드시 성취되어야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내면에 오래 남고, 어떤 이별은 실패처럼 보였지만 이후의 삶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지울 수 없지만 그때의 자신을 조금 다르게 이해할 수는 있다. “왜 그랬을까”라고 자책했던 기억을 “그때의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구나”라고 바라보게 되는 순간, 기억은 후회에서 이해로 이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연가〉의 위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타지에 있지 않다. 돌아갈 수 없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다. 다시 만나지 못해도 그 사람이 내 삶에 있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헤어진 사랑도 실패한 관계도 한때 서로에게 진심이었다면 그것만으로 삶의 일부가 된다. 2026년 시즌에는 중년 명우 역에 손준호와 이석훈이 출연한다. 월하는 에녹·차지연·서은광, 수아는 류승주·선예, 시영은 문진아·박세미가 맡는다. 젊은 시절의 명우는 기세중·박희준, 젊은 수아는 김서연·이은정이 연기하며 김민수가 중곤으로 함께한다. 이영훈의 음악에 고선웅의 극본, 이지나의 연출, 김성수의 편곡·음악감독, 서병구의 안무가 더해진다. 이번 시즌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작품 자체가 다루는 ‘시간’이라는 주제와 〈광화문연가〉의 음악이 가진 세대성이 만난다는 점이다. 이영훈의 노래를 발표 당시 들었던 세대에게 이 작품은 실제 자신의 청춘을 되감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반면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부모 세대의 음악 혹은 오래된 명곡을 오늘의 배우와 무대로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 된다. 같은 ‘붉은 노을’을 듣더라도 누군가는 1980년대를, 누군가는 2000년대의 리메이크를, 또 누군가는 2026년의 공연장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음악이 가진 특별한 생명력이다. 시대는 지나가지만 노래는 다른 사람의 기억 속으로 옮겨가며 다시 살아난다. 한 세대의 추억이 다음 세대의 새로운 기억이 되는 순간, 오래된 노래는 더 이상 과거의 음악이 아니다. 2026년 〈광화문연가〉는 9월 6일부터 11월 15일까지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러닝타임은 인터미션 20분을 포함해 155분이며 8세 이상 관람할 수 있다. 2017년 초연 이후 다섯 번째 시즌을 맞는 이번 공연은 첫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봄의 첫사랑, 여름의 청춘, 가을의 회상, 겨울의 이별이라는 사계절의 이미지와 연결해 다시 펼쳐낸다. 공연장을 나서면서 결국 떠오르는 것은 ‘내가 명우라면 어느 순간으로 돌아갈까’라는 질문이다. 가장 행복했던 하루일 수도 있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날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러 갈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무 걱정 없이 가족과 밥을 먹었던 평범한 저녁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질문을 오래 생각하다 보면 조금 다른 곳에 도착한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은 그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 시절의 사람과 사랑, 실패와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은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 돌아가지 않아도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시간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