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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 전시

왕관보다 나 자신을 원했던 여자 — 뮤지컬 〈엘리자벳〉

가장 아름다운 황후의 전기가 아니라, 누구의 것도 되지 않으려 했던 한 인간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

미디어2026. 09. 02
뮤지컬 〈엘리자벳〉을 단순히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의 일대기라고 생각하면 이 작품의 절반만 보게 된다. 실제 역사 속 엘리자벳을 바탕으로 하지만, 극은 그녀의 생애에 ‘죽음(Der Tod)’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끌어들인다. 죽음은 엘리자벳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그녀를 유혹하고, 때로는 사랑하며, 때로는 그녀가 가진 자유에 대한 갈망을 더욱 흔들어놓는다. 199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된 미하엘 쿤체·실베스터 르베이의 작품은 이후 10여 개 언어로 공연되며 세계 누적 관객 1,250만 명 이상을 기록했고, 한국에서는 2012년 초연 이후 2026년 여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작품의 시작부터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의 화자가 엘리자벳이 아니라 그녀를 암살한 루이지 루케니라는 사실이다. 죽은 자들이 깨어난 세계에서 루케니는 황후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덕분에 〈엘리자벳〉은 위인의 삶을 아름답게 복원하는 전기극과 거리를 둔다. 황후를 둘러싼 숭배와 소문, 황실의 권력과 민중의 불만, 사랑과 죽음이 뒤섞이면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아름다운 황후’의 이미지를 계속 의심하게 만든다.

엘리자벳은 자유롭게 성장한 어린 시절을 지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사랑에 빠지고 황실로 들어간다. 동화라면 이쯤에서 행복한 결혼으로 끝나야 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황후가 된다는 것은 개인에게 주어진 최고의 행운처럼 보이지만 엘리자벳에게 왕관은 점점 무거운 구속이 된다. 대공비 소피는 황실의 전통과 의무를 요구하고, 프란츠 요제프는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황제라는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자녀를 양육할 권리까지 자신의 뜻대로 갖지 못하면서 엘리자벳은 깨닫기 시작한다. 자신이 얻은 것은 권력이 아니라 화려하게 장식된 감옥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세상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엘리자벳〉이 30년 넘게 낡지 않는 첫 번째 이유다. 우리는 황실에 살지 않지만 타인이 만들어놓은 기준 안에서 살아가는 경험에는 익숙하다.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 결혼, 경제적 성공처럼 사회가 정해놓은 ‘좋은 삶’의 목록을 하나씩 통과하면서도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얻었는데 정작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순간도 찾아온다. 엘리자벳에게 황실이 그랬듯, 우리에게도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황실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래서 작품의 대표 넘버 ‘나는 나만의 것(Ich Gehör Nur Mir)’은 단순한 독립 선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엘리자벳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황제의 아내이기 전에, 황후이기 전에, 어머니이기 전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어 한다. 작품이 공식적으로 소개하는 대표 넘버 역시 ‘나는 나만의 것’, ‘마지막 춤’, ‘밀크’, ‘키치’, ‘그림자는 길어지고’ 등이다. 강렬한 록 사운드와 서정적인 선율은 인물들의 욕망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정 자체를 무대 위로 밀어 올린다. 

자유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엘리자벳 곁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다. 이 작품에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을 끝내는 사건이 아니다. 매혹적인 인물로 의인화된 죽음은 엘리자벳에게 황실도, 의무도, 세상의 시선도 없는 완전한 해방을 속삭인다. 그래서 둘의 관계를 흔한 로맨스로만 바라보면 작품의 핵심이 흐려진다. 죽음이 사랑하는 것은 엘리자벳이지만, 엘리자벳이 갈망하는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 누구도 자신을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자유에 가깝다. 죽음은 바로 그 욕망의 가장 위험하고 극단적인 얼굴이다.

이 설정 때문에 ‘마지막 춤’은 강렬하다. 죽음은 엘리자벳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하면서 결국 자신과 함께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누군가에게 완전히 소유되기를 거부한다. 〈엘리자벳〉의 핵심은 죽음과 사랑에 빠진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 어느 쪽에도 자신의 주도권을 쉽게 넘겨주지 않으려 했던 인간의 투쟁이다.

물론 그 투쟁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엘리자벳의 자유에 대한 집착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특히 아들 루돌프와의 관계는 작품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황실의 억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엘리자벳이지만 정작 자신처럼 고립되어가는 아들에게 충분한 피난처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그림자는 길어지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루돌프의 비극은 자유를 갈망하는 개인의 문제가 다음 세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작품은 엘리자벳을 무조건적인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자유를 원하는 마음은 정당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잘 돌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자신의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 모든 힘을 써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자벳의 삶은 자유에 관한 찬가이면서 동시에 자유의 대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지키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작품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키치(Kitsch)’다. 루케니는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아름다운 이미지와 상품으로 소비되는지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황후의 초상과 기념품을 소비하면서 실제 인간 엘리자벳의 고독과 모순에는 관심을 잃는다. 이 시선은 지금의 셀러브리티 문화에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사진과 짧은 영상, 몇 개의 기사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인간보다 우리가 소비하기 좋은 이미지가 더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엘리자벳〉의 화려한 의상과 황실의 장관은 역설적이다. 눈은 황홀하지만 그 아름다움 안에 있는 사람은 질식하고 있다. 화려함은 행복의 증거가 아니라 때때로 고독을 가장 완벽하게 감추는 장식이 된다. 관객은 아름다운 황실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엘리자벳을 바라본다. 이 모순이 작품 특유의 매혹을 만든다.

2026년 시즌은 이런 오래된 질문을 새로운 배우들의 얼굴로 다시 꺼낸다. 엘리자벳 역에는 린아·이지혜·이지수, 죽음 역에는 카이·서경수·고은성, 루케니 역에는 박은태·강홍석·노윤이 출연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민영기·박민성, 소피는 서지영·주아, 루돌프는 장윤석·김우성이 맡는다. 제작진은 이번 여섯 번째 시즌에서 기존 작품의 깊이를 유지하면서 한층 정교해진 무대예술과 새로운 해석을 예고했다. 

그리고 지금 관객의 반응도 뜨겁다. 9월 2일 현재 NOL의 뮤지컬 일간 랭킹에서 〈엘리자벳〉은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예매 페이지에는 8월 16일 개막 이후 관람 리뷰가 축적되고 있다. 공연은 11월 15일까지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를 거대한 무대와 유명 넘버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시대가 달라질수록 오히려 엘리자벳의 질문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SNS의 시선과 가족의 기대, 조직의 기준과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의 속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한다.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먼저 고민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에게 엘리자벳의 삶은 묘한 위로를 남긴다.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것. 왕관을 쓴 사람조차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는 것. 그리고 자유는 어느 날 누군가가 선물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계속 질문하면서 조금씩 확보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 삶을 되찾는 첫 번째 순간은 세상이 원하는 나와 내가 원하는 나 사이의 차이를 알아차리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벳〉은 행복한 황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불행한 황후의 전기만도 아니다. 사랑받고 싶지만 소유되고 싶지는 않았고, 가족을 원하면서도 자신을 잃고 싶지는 않았으며, 자유를 갈망하면서 그 자유 때문에 고독해진 한 인간의 모순을 바라보는 작품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황후의 초상보다 한 문장에 가까운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의 기대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왕관은 시대마다 모습을 바꾼다. 어떤 사람에게는 직함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며, 누군가에게는 좋은 부모나 좋은 자식이라는 역할일 수 있다. 그것을 모두 벗었을 때 남아 있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결국 자유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과 역할 속에서도 끝내 ‘나’를 잃지 않는 일인지 모른다.

“나는 나만의 것.”
이 짧은 선언이 강렬한 이유는 이기적인 독립을 말해서가 아니다. 가족도 사랑도 사회적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관계가 한 인간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붙어 있는 직함과 역할, 다른 사람의 기대를 모두 내려놓는다면 그 뒤에 남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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