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 전시
18년을 이어온 대학로 블랙코미디, ‘죽음’을 농담의 끝이 아니라 삶을 되묻는 출발점으로 바꾸다
제목부터 위험하고 유쾌하다. ‘죽여준다’는 말에는 죽음과 ‘끝내준다’는 감탄이 동시에 들어 있다. 연극 〈죽여주는 이야기〉는 이 언어유희를 작품 전체의 방식으로 확장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운영하는 ‘안락사’가 있다. 그는 스카이다이렉트, 줄 없는 번지점프 같은 기상천외한 상품을 내놓으며 사람들에게 확실한 죽음을 제공한다고 자부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그의 앞에 죽고 싶다면서도 이유를 좀처럼 밝히지 않는 수수께끼의 여자 ‘마돈나’와 어딘가 어설픈 ‘바보레옹’이 나타난다. 세 사람이 한 공간에서 얽히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단순해 보였던 의뢰 뒤의 사연과 각자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설정만 떼어놓고 보면 상당히 잔혹하다. 그런데 공연은 이 잔혹함을 정색하고 바라보지 않는다. 과장된 캐릭터와 언어유희, 예상하지 못한 상황, 배우와 관객이 직접 주고받는 즉흥적인 호흡을 이용해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관객은 어느 순간 묘한 상황에 놓인다. 분명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불편한 모순이야말로 〈죽여주는 이야기〉가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사용하는 핵심이다.

블랙코미디는 비극을 가볍게 만드는 장르가 아니라, 너무 무거워 제대로 바라보기 힘든 현실을 웃음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다시 보게 만드는 장르다.
〈죽여주는 이야기〉에서 죽음은 낭만적인 탈출구로 그려지기보다 인간의 욕망과 모순을 드러내는 극적인 장치에 가깝다. 안락사는 죽음을 하나의 ‘상품’처럼 판매한다. 죽음마저 소비의 언어로 포장하고 가격과 방법을 붙이는 설정 자체가 기괴한 풍자다. 무엇이든 서비스가 되고 상품이 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가장 마지막 선택까지 거래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인간다운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작품의 과장된 세계를 조금만 현실 쪽으로 끌어당기면 웃음 뒤에서 이런 질문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지나치게 철학적인 죽음의 담론으로만 읽을 필요도 없다. 18년 동안 대학로에서 살아남은 가장 현실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분명한 ‘재미’다. NOL은 현재 작품을 ‘블랙코미디 최강자’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공연은 약 90분 동안 진행된다. 2026년 8월 기준 NOL 검색 결과에는 1만 건이 넘는 관람 리뷰가 축적돼 있다. 최근 후기에서도 유쾌함과 웃음, 재관람 의사를 이야기하는 관객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래 공연되는 코미디에는 대개 관객과의 관계가 있다. 무대 위 배우들끼리 완성된 이야기를 보여주고 관객은 조용히 지켜보는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죽여주는 이야기〉는 객석의 존재를 공연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순간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배우의 애드리브와 호흡도 살아난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그날 객석에 누가 앉아 있었는지에 따라 조금씩 다른 공연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관객은 죽음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웃음을 통해 이 기묘한 세계에 잠시 공범처럼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
여기에는 소극장 공연만의 힘도 있다. 지인시어터는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인근에 자리한 176석 규모의 공연장이다. 배우의 표정과 목소리가 관객 가까이 도착하는 공간에서 관객 참여형 코미디는 더욱 강한 현장성을 갖는다. 거대한 무대 장치보다 배우의 순발력과 캐릭터, 객석의 반응이 공연을 움직인다. 그래서 〈죽여주는 이야기〉를 영상 콘텐츠와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줄거리 자체보다 ‘그날 그 객석에서 함께 웃었다’는 경험에 있다.
그러나 웃음이 걷힌 뒤 남는 것은 의외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마돈나가 왜 안락사를 찾아왔는지, 바보레옹은 왜 그곳에 있는지, 안락사는 정말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인지 따라가다 보면 작품 초반의 명확해 보였던 관계가 조금씩 흔들린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역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웃기면서 슬프고, 누군가는 악당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허술하며, 누군가는 죽겠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다른 무언가를 절박하게 원하고 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고 말할 때, 그가 정말 끝내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짓누르는 어떤 상황일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작품은 웃음과 위로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만든다. 삶은 언제나 진지한 방식으로만 견뎌지는 것이 아니다. 너무 힘든 순간에는 오히려 농담 하나가 숨 쉴 틈을 만들기도 한다. 친구와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다가 웃거나, 자기 처지를 자조적으로 농담하면서 하루를 버티기도 한다. 웃는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 세상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작품의 코미디를 현실의 극심한 고통이나 자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현실의 위기는 공연처럼 반전 한 번이나 농담 몇 마디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이 작품에서 가져올 만한 메시지는 ‘힘들어도 웃어라’가 아니다. 타인의 삶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떤 사람의 마지막 선택을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18년이라는 시간은 이 작품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죽여주는 이야기〉는 2008년 5월 15일부터 공연 기록을 이어왔고, 2026년에는 ‘18주년’ 타이틀을 달았다. 현재 NOL과 공연장 정보에는 지인시어터(구 알과핵소극장)에서 2026년 11월 30일까지 공연 일정이 등록돼 있다. 8세 이상 관람 가능하며 러닝타임은 90분이다. 18년이면 관객도 변한다. 대학생이었던 관객이 직장인이 되고,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 다시 대학로를 찾을 만큼 긴 시간이다. 그 사이 웃음의 코드도 변했고 우리가 죽음과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그런데도 이 작품의 기본적인 상황이 계속 관객과 만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모순이 쉽게 낡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다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고,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고, 실패했던 기억을 지우고 싶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삶의 소멸이라기보다 지금과 다른 삶일 가능성이 크다.


끝내고 싶다는 마음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은 때때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죽여주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공연이 끝난 뒤 다시 바라보면 처음과 조금 다르게 읽힌다. 누군가를 ‘죽여주는’ 이야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무대에 남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우스꽝스럽고 복잡한 얼굴이다. 사람은 자신의 계획대로 살지 못하고, 관계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며,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뒤집힌다. 그런데 바로 그 예측 불가능함 때문에 삶은 계속 다음 장면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완벽한 해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아직 결말을 모르는 상태를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이 엉망이었다고 해서 내일까지 반드시 엉망이라는 법은 없다. 지금 만난 사람이 내 인생에서 어떤 사람이 될지 알 수 없고,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몇 년 뒤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삶이 때때로 견딜 만한 이유는 그것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아직 다음 장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죽여주는 이야기〉가 18년 동안 관객을 웃게 만든 힘도 어쩌면 여기에 있다. 죽음이라는 가장 무거운 결말을 무대 한가운데 가져다 놓고도 공연은 끊임없이 예상 밖의 방향으로 달린다. 관객은 웃고, 배우와 말을 주고받고, 반전을 만나며 처음 생각했던 결말에서 계속 벗어난다. 그렇게 작품은 꽤 엉뚱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인생의 결말을 너무 빨리 확정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