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 전시
1980년대 서울과 전쟁의 알레포, 서로 다른 두 도시에서 하나의 헬멧이 묻는 인간의 존엄
연극 〈더 헬멧〉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대를 봐야 한다. 이 작품에는 하나의 객석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무대를 ‘빅 룸’과 ‘스몰 룸’으로 나누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다. 관객은 자신이 앉은 위치에 따라 같은 사건의 다른 얼굴을 목격한다. 2026년 시즌 역시 이러한 독특한 형식을 유지하며 ‘룸 서울’과 ‘룸 알레포’를 통해 시대와 장소를 넘어 반복되는 폭력,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이 다시 작품을 맡았으며 4년 만의 귀환이다. ‘룸 서울’이 향하는 곳은 한국 현대사의 뜨거운 시간이다. 1987년과 1991년 민주화운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백골단과 학생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쪽에서는 누군가를 찾고, 다른 쪽에서는 누군가가 숨어 있다. 진압하는 사람과 저항하는 사람,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과 그 명령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 작품은 어느 한쪽을 멀리서 설명하기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관객을 사건 가까이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룸 알레포’에서는 시선이 2017년 시리아로 이동한다. 내전으로 폐허가 된 도시, 무너진 건물 아래 사람을 찾는 민간 구조대와 잔해 속에 갇힌 아이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방에서 진행된다. 이때 작품의 제목인 ‘헬멧’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서울에서 헬멧이 공권력과 진압을 연상시켰다면 알레포의 하얀 헬멧은 폐허 속 생명을 찾는 구조대의 상징이 된다. 같은 사물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헬멧은 사람을 보호하는 물건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을 쓴 사람이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는가이다. 이 대비가 〈더 헬멧〉의 가장 강력한 질문을 만든다. 폭력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누군가 명령을 내리고, 누군가는 그 명령을 수행하며, 다른 누군가는 그 결과를 감당한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보다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명확한 구분을 넘어 한 가지 불편한 질문과 만나게 된다. 평범한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가. 특히 ‘룸 서울’에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역사보다 그 역사 속에 들어가 있는 개인이다. 제복을 입었다고 해서 인간적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개인적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속한 구조의 폭력에서 자동으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조직의 명령과 개인의 양심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은 민주화운동이라는 특정 시대에만 머무는 질문이 아니다. 회사와 학교, 군대와 국가처럼 위계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반복되는 문제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이 개인의 책임을 완전히 지워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자신의 선택에 책임져야 할까.


반면 ‘룸 알레포’가 보여주는 인간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폭격이 반복되는 도시에서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장소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영웅적인 낭만보다 훨씬 현실적인 공포가 존재한다. 구조하는 사람 역시 죽을 수 있다. 그럼에도 폐허 속에서 사람을 찾는다. 거대한 정치적 갈등을 개인이 해결할 수는 없지만,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구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알레포에서 인간의 존엄과 일상의 회복을 이야기한다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더 헬멧〉이 말하는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두려운데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순간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용기 있는 사람을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했던 사람들 역시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두려워했고 살고 싶었으며 가족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에는 다른 선택을 했다.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두려움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간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작품의 형식 역시 이런 철학과 연결된다. 관객은 한 번의 관람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빅 룸에서 공연을 봤다면 벽 너머 스몰 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완전히 알 수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서로가 알고 있는 진실은 다르다. 과거 공연에서도 ‘룸 서울’은 백골단과 학생, ‘룸 알레포’는 화이트헬멧과 아이의 시점을 빅 룸과 스몰 룸에 달리 배치했다. 이 구조는 단순한 관람 gimmick이 아니다.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과 닮았다. 하나의 사건을 경험해도 사람마다 기억은 다르다. 자신이 서 있었던 위치에 따라 피해와 공포, 책임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누군가에게 역사적 사건이었던 하루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을 잃은 날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보지 못한 ‘벽 너머의 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내가 본 것이 진실이라고 해서, 내가 보지 못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은 지금의 사회에서도 유효하다. 우리는 이전보다 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보고 싶은 정보만 선택하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판단하고 편을 나누며 타인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정의한다. 하지만 〈더 헬멧〉은 관객에게 의도적으로 결핍된 시야를 준다. 모든 것을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불완전함 때문에 우리는 벽 건너편을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벽’ 역시 헬멧만큼 중요한 상징이다. 벽은 사람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분리한다. 벽 너머에서 비명이 들려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다. 현실에서도 비슷하다. 국경과 언어, 세대와 이념이라는 벽이 생기면 타인의 고통은 쉽게 숫자가 된다. 전쟁에서 몇 명이 죽었다는 뉴스는 읽을 수 있지만 그 한 사람이 어떤 음악을 좋아했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어떤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연극은 그 숫자를 다시 사람으로 돌려놓는다. 서울의 학생도, 진압에 투입된 사람도, 알레포의 구조대원도, 잔해 속 아이도 하나의 개별적인 인간으로 무대 위에 존재한다. 역사책에서는 한 문장으로 지나갈 사건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에게 그 순간은 자신의 전부였다. 이것이 공연예술이 역사를 다루는 중요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사건을 설명하는 대신 그 안에 있었던 사람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더 헬멧〉의 위로 역시 쉽게 낙관적이지 않다. 폭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인간은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전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그러나 그 반복 속에서도 누군가는 사람을 숨겨주고, 누군가는 잔해 속으로 들어가며, 누군가는 자신의 명령을 의심한다. 세상이 완전히 좋아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인간의 선의를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작품이 남기는 가장 오래된 희망이다. 우리는 거대한 역사를 혼자 바꾸기 어렵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선택에서는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밀어낼 것인지 손을 내밀 것인지, 침묵할 것인지 질문할 것인지, 명령만 바라볼 것인지 눈앞의 사람을 바라볼 것인지. 2026년 〈더 헬멧〉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2017년 초연 이후 시간이 흘렀지만 작품이 던졌던 질문은 과거형이 되지 않았다. 2026년 시즌은 7월 9일부터 10월 11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되며, 70분 동안 인터미션 없이 진행된다. 제작진은 이번 시즌 역시 분리된 공간과 연결된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시대에 반복되는 폭력과 인간의 존엄을 바라본다고 설명한다. 공연장을 나선 뒤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헬멧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헬멧 아래에 있었던 얼굴들이다. 우리는 어떤 조직의 구성원이기 전에 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 역시 어떤 집단의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 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거대한 폭력을 멈추는 가장 작고 오래된 출발점인지 모른다.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헬멧을 씌워줄지는 선택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헬멧을 쓰고 누구를 바라볼 것인지는 끝까지 우리의 선택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