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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 전시

오늘을 붙잡는다는 건, 결국 내 삶을 선택하는 일 —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

“Carpe Diem.” 정답을 잘 맞히는 삶보다 자신만의 문장을 써 내려가는 삶에 대하여

미디어2026. 08. 26
1950년대 미국의 명문 기숙학교 웰튼 아카데미. 이곳의 학생들에게 좋은 삶의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다. 명문대에 진학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 전통과 명예, 규율과 성취가 학교를 지배하고 학생들은 자신의 욕망보다 부모와 학교가 만들어놓은 미래를 향해 달린다. 그곳에 새로운 영어 교사 존 키팅이 등장한다. 그는 시를 시험 문제의 정답처럼 가르치지 않는다. 책상 위에 올라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고, 시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하게 한다. 학생들은 오래전 키팅이 참여했던 비밀 모임 ‘죽은 시인의 사회’를 부활시키고, 밤마다 동굴에 모여 시를 읽으며 처음으로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 이야기가 1989년 영화가 나온 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반복해서 호출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는 여전히 웰튼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대는 변했고 성공의 모습도 달라졌지만, 사람에게 정답을 요구하는 방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업, 적당한 연봉, 인정받는 경력.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검열한다. 하고 싶은 일보다 실패하지 않을 일을 고르고, 좋아하는 것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게 조금씩 ‘나의 인생’이 ‘괜찮아 보이는 인생’으로 바뀐다.



인생의 비극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내가 무엇을 꿈꾸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키팅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단순한 자유분방함이 아니다. 그의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이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기준을 의심하고, 세상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것. 그래서 책상 위에 올라서는 유명한 장면은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우리가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 상징적인 행동이다.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선택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닐 페리는 작품의 질문을 가장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우등생이지만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갖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닐은 연극 무대에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발견한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그에게 단순한 진로 선택이 아니다. 처음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자기 존재의 발견이다. 문제는 부모가 생각하는 사랑과 닐이 원하는 삶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작품은 부모 세대를 단순한 악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아프다. 누군가의 미래를 대신 결정하는 행동은 때때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에는 실제 걱정과 애정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택과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일은 전혀 다르다. 선의 역시 상대방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순간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결정할 수는 없다. 사랑의 반대편에는 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나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하려는 마음도 있다.

토드 앤더슨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닮았다. 형과 비교되며 자란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믿지 못한다. 말해야 할 순간에도 침묵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먼저 의식한다. 키팅은 그런 토드에게 완성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언어를 끌어낸다. 토드의 변화가 인상적인 이유는 갑자기 용감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다.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용기는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두렵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 자신감이 충분해진 뒤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자신을 데리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것. 그래서 〈죽은 시인의 사회〉의 성장은 거창하지 않다. 누군가는 연극 무대에 서고,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는 시를 읽는다. 하지만 그 작은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이다.

자기답게 산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 더 크게 듣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문장이 있다. ‘Carpe Diem’, 오늘을 붙잡으라는 말이다. 너무 유명해진 탓에 지금은 현재를 즐기라는 가벼운 문구처럼 소비되기도 한다. 하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이 말은 훨씬 무겁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며 언젠가 우리 역시 과거의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에 가깝다. 키팅이 오래전 학생들의 사진을 바라보게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그들도 한때는 지금의 학생들처럼 미래가 무한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므로 오늘을 붙잡는다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라는 충동적인 선언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그것을 선택할 책임까지 감당하라는 요청이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라온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모든 규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거부할지 스스로 판단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는 단순한 청춘 찬가보다 훨씬 복잡한 작품이 된다. 닐의 비극 이후 학교는 책임을 키팅에게 돌리고 학생들에게 서명을 요구한다. 개인의 자유를 가르친 교사가 조직의 질서를 위협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제도가 책임을 처리하는 방식, 권위에 순응하는 인간의 심리,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이 현실에서 얼마나 어려운지를 마주한다.

누구나 키팅의 말을 좋아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조직에서 불합리한 일을 발견했을 때, 가족의 기대와 자신의 욕망이 충돌할 때,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갈 때 혼자 다른 선택을 하는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이 감동적인 것은 학생들이 완전히 자유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두려움을 알고도 아주 잠깐 자신의 선택으로 일어섰기 때문이다.



자유란 아무런 대가 없이 원하는 것을 얻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삶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태도에 더 가깝다.

2026년 한국 초연은 영화의 각본가 톰 슐만이 직접 무대극으로 각색한 정식 라이선스 작품을 바탕으로 한다. 원작 영화는 슐만에게 아카데미 각본상을 안겼고, 무대판은 2016년 미국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다. 한국 공연에서는 존 찰스 키팅 역을 차인표·오만석·연정훈이 맡으며, 닐 페리 역에는 김락현·이재환·찬희가 출연한다. 토드 앤더슨을 비롯한 학생들이 객석과 가까운 무대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점은 영화와 다른 연극만의 감각을 만든다. 

특히 지금 다시 이 이야기를 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선택지를 가진 시대에 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선택을 너무 쉽게 들여다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SNS를 열면 누군가의 성공과 여행, 커리어와 행복이 끝없이 나타난다. 선택지가 많아진 만큼 비교의 기준도 많아졌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는 말은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이 됐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을 나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건네는 위로는 모든 꿈이 이루어진다는 낙관이 아니다. 세상에는 현실적인 조건이 있고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 다만 그럼에도 한 사람의 삶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좋은 성적도, 안정적인 직업도, 타인의 인정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삶 전체의 목적이 되는 순간 우리는 정작 자신의 인생에서 관객이 될 수 있다.

키팅은 학생들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방향을 명령하지도 않는다. 그저 질문한다. 너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그 질문은 1950년대 웰튼 아카데미를 지나 2026년 대학로의 객석까지 도착한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과제는 성공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문장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쓰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했을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완벽한 문장을 남겼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문장이 나의 것이었는가. 〈죽은 시인의 사회〉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람을 움직이는 이유는 아마 그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작품을 대표하는 키팅의 말이다. ‘오늘을 붙잡으라’는 것은 매 순간 즐겁게 살라는 뜻만은 아니다. 유한한 시간을 타인의 기준만 충족시키며 흘려보내지 말라는 경고이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스스로 참여하라는 요청에 가깝다. 만약 지금까지의 기대와 평가를 모두 내려놓고 오직 당신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당신은 남은 인생에 어떤 ‘시’를 쓰고 싶나요?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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