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 전시
《꼬마 니콜라》의 삽화가를 넘어, 웃음과 쓸쓸함 사이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를 기록한 장 자크 상페
장 자크 상페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꼬마 니콜라》가 떠오른다. 장난꾸러기 아이들과 조금은 허술한 어른들, 몇 개의 선만으로도 금세 살아나는 표정들. 그러나 2026년 9월 10일부터 2027년 1월 3일까지 마이아트뮤지엄 원그로브점에서 열리는 〈봉주르, 장자크 상페: 세상을 그린 시선〉은 상페를 ‘추억 속 삽화가’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약 10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특별전으로, 《꼬마 니콜라》의 원화를 비롯해 파리의 일상, 음악과 유머를 담은 원화와 드로잉 등 약 130점을 통해 한 사람의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조명한다. 상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먼저 이상한 크기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거대한 건물과 넓은 광장, 끝없이 펼쳐진 공원과 도시 사이에 사람은 점처럼 작게 놓여 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인간의 고독이라고 해석하지만, 상페 자신은 조금 다르게 말했다. 그의 인물들이 작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큰 것이라고. 이 차이는 중요하다. 인간을 초라하게 만드는 시선과 세계의 거대함을 인정하는 시선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상페에게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라기보다 거대한 세상에서 자신의 몫만큼 살아가는 존재다. 넘어지고, 허세를 부리고, 사랑에 실패하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작아 보이는 것은 가치가 작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페의 그림에는 좀처럼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공원 벤치에 앉은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연주하는 음악가,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 연인과 아이들이 있다. 특별한 사건도 많지 않다. 그런데 오래 바라보면 그 평범한 장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군가는 외롭고, 누군가는 사랑에 빠졌으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 인간의 우스운 허영과 소심함까지 몇 개의 선으로 포착된다. 전시가 상페의 작업을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깊은 관찰’이자 ‘웃음 속에 삶을 담은 기록’으로 소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페의 유머가 특별한 지점도 여기에 있다. 그는 사람을 조롱하기 위해 웃기지 않는다. 2009년 인터뷰에서 자신은 자신이 그리는 인간들로부터 스스로를 제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등장인물을 비웃는 순간 자신 역시 함께 비웃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유머란 높은 곳에서 타인을 평가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조금씩 우습고 모순된 존재임을 인정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며 웃다가도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서늘해진다. 방금 웃었던 인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상페의 유머는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웃음이 아니라, ‘우리도 다 비슷하지 않나요?’라고 조용히 건네는 미소에 가깝다.
이러한 시선은 그의 삶을 알고 나면 더욱 깊어진다. 상페의 어린 시절은 《꼬마 니콜라》처럼 명랑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과 가족의 갈등 속에서 성장했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고 비극적인 시간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훗날 그는 힘들었던 어린 시절 때문에 친구들을 웃게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사람이 훗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그렸다는 사실은 묘한 울림을 남긴다. 어쩌면 《꼬마 니콜라》의 세계에는 자신이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유년의 풍경도 조금은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페의 밝음은 현실을 모르는 사람의 낙관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선택한 유머에 가깝다. 그는 2020년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람을 잠시라도 웃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명랑함보다 훨씬 단단한 태도다. 슬픔을 제거한 뒤 웃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웃을 이유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로란 슬픔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있는 날에도 우리가 잠시 웃을 수 있도록 옆자리를 내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페의 그림에서 또 하나 놓치기 어려운 것은 여백이다. 거대한 종이에 작은 인물이 등장하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공간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여백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관객이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집어넣을 수 있는 자리다. 상페의 그림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작업에서도 그의 화풍이 ‘생략과 빈 공간’을 통해 독자가 꿈꾸고 해석할 여지를 준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됐다. 오늘날의 이미지가 화면을 정보와 자극으로 가득 채우려 한다면 상페는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덜 보여주면서 더 오래 보게 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2026년에 다시 만나는 상페가 흥미롭다. 우리는 짧은 영상과 수없이 많은 이미지를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살아간다. 몇 초 안에 재미가 없으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마이아트뮤지엄 역시 이번 전시를 소개하면서 빠르게 이미지를 소비하는 오늘의 환경과 천천히 바라볼수록 이야기가 많아지는 상페의 그림을 대비시킨다. 상페의 그림 앞에서는 속도를 조금 늦춰야 한다. 작은 표정과 멀리 있는 사람, 창문 하나와 나무 한 그루까지 바라보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가 나타난다.
이것은 그림 감상법을 넘어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너무 빨리 판단하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하루를 ‘별일 없었던 날’이라고 삭제하며 살아갈까. 상페는 대단한 사건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관심을 두었다.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에도, 연주를 기다리는 음악가에게도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


평범한 하루가 시시한 것은 아무 일도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너무 빨리 지나치기 때문일 수 있다.
특히 음악은 상페의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그는 어린 시절 듀크 엘링턴을 좋아했고 원래 피아노를 배우는 것이 꿈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피아노보다 연필과 종이를 구하는 것이 쉬웠고 결국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훗날에도 그는 수많은 음악가와 연주 장면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바라보면 실제로 음악을 듣는 것 같은 리듬이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작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의 움직임이 모여 하나의 장면을 만든다. 마치 각자의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 함께 하나의 곡을 완성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상페의 그림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중요한 위로는 무엇일까. 아마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에 가까울 것이다. 그의 그림 속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성공한 영웅도 아니다. 조금 외롭고, 조금 허술하고, 가끔은 허영심이 있으며 사랑 앞에서는 서툴다. 그런데도 상페는 그들을 그림의 중심에 놓는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하루도 충분히 바라볼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주르, 장자크 상페〉를 보고 나면 자신의 하루를 이전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매일 지나치는 거리와 카페, 출근길 지하철과 공원의 벤치,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 그동안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풍경 속에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의 거대한 풍경 속에서는 상페가 그린 작은 사람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작다는 것은 사소하다는 뜻이 아니다.


거대한 세계 속에서 작은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상페는 인간의 부족함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웃음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그림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이유다. 시대는 바뀌어도 인간은 여전히 사랑 앞에서 서툴고, 관계 때문에 고민하며, 때로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봉주르, 장자크 상페: 세상을 그린 시선〉은 결국 그림을 보는 전시인 동시에 사람을 바라보는 연습이다. 조금 천천히, 조금 멀리서, 쉽게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 그렇게 바라보다 보면 완벽하지 않은 인간에게도 꽤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