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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사랑은 왜 가장 추운 시간을 지나서야 꽃이 되는가

조정래의 마지막 장편 『서리꽃』, 돈과 권력이 인간의 삶을 흔드는 세계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사랑에 대하여

미디어2026. 09. 25
조정래가 사랑 이야기를 썼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서 거대한 현대사의 굴곡을 통과했고, 『정글만리』와 『천년의 질문』, 『황금종이』에서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집요하게 바라봤던 작가다. 그런 그가 등단 56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장편소설을 내놓았다. 2026년 8월 해냄에서 전 2권으로 출간된 『서리꽃』이다. 조정래는 이 작품을 자신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조정래가 사랑을 쓴다고 해서 세상이 갑자기 낭만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리꽃』의 사랑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이야기는 대학 시절로 돌아간다. 시 동아리 ‘글밭’에서 활동하는 이재이와 미대생 윤소인은 시화전을 계기로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윤소인은 재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변용한 그림을 그리고, 문학과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가 두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삶까지 사랑의 편이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사업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이는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5년 뒤 돌아온 그가 다시 만난 소인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 몰락을 경험했고 몸과 마음까지 병들어 있다. 

여기서 소설은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빛나던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 우리는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진짜 얼굴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니라, 상대의 삶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재이는 소인을 다시 살게 하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이 결심에는 낭만적인 고백보다 훨씬 무거운 현실이 따라붙는다. 빚을 해결해야 하고 치료비와 요양비를 마련해야 한다. 그는 돈과 권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의 세계에 그대로 편입되는 대신 형 재균과 비밀스러운 계약을 맺으며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서리꽃』은 평범한 연애소설의 궤도를 벗어난다.

조정래에게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단순한 오해나 운명이 아니다. 돈이고, 계급이며, 가부장적 권력이고, 인간의 존엄보다 경제적 가치를 먼저 계산하는 사회다.

작가 역시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 작품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현실과 연결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천민자본주의의 탐욕이 건강한 시민의 삶을 무너뜨리는 현실에서 사랑이 어떻게 파괴되고,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다시 만들어갈 것인지를 작품의 문제의식으로 제시했다. 

그래서 『서리꽃』은 사랑과 돈을 서로 멀리 떨어진 주제로 두지 않는다.

사랑에는 현실이 따라온다.

아픈 사람을 돌보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치료에는 돈이 필요하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집이 필요하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조건과 부딪쳐야 한다.

우리는 흔히 진정한 사랑이라면 돈과 상관없다고 말하지만, 가난과 부채와 질병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실제로 흔든다.

조정래는 바로 그 불편한 현실 속으로 사랑을 밀어 넣는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함이 아니라, 현실을 모두 알고도 한 사람의 곁에 남겠다고 결정하는 용기다.

이 작품의 제목이 ‘서리꽃’이라는 것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서리꽃은 따뜻한 봄날 피어나는 꽃이 아니다. 차가운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소설 속 사랑도 그렇다.

재이와 소인의 관계는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상처와 현실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을 지나면서 사랑은 젊은 날의 설렘에서 책임과 돌봄의 감정으로 변해간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좋아한다는 감정을 오래 유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상대가 가장 약해졌을 때 그 약함까지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인가.

『서리꽃』은 후자에 조금 더 가까이 서 있다.

흥미로운 것은 83세의 조정래가 자신의 마지막 장편에서 결국 ‘사랑’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70년 등단한 이후 50년 넘게 역사, 분단, 산업화, 자본주의, 국가와 권력의 문제를 써왔다. 그런 작가가 긴 장편의 마지막에서 인간의 가장 사적인 감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사랑은 그의 이전 작품들과 전혀 다른 주제가 아닐 수도 있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결국 그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것도 결국 그 구조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의 삶을 바라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사회 문제의 끝에는 언제나 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 곁에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

조정래는 『서리꽃』을 쓰며 “사랑은 인간이 삶을 존속해 나가는 데 희망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험악해지더라도 인간은 결국 사랑을 만들어낼 것이며, 그는 이를 작품의 또 하나의 주제로 설명했다. 

세상이 아무리 차가워져도 인간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 문장이 『서리꽃』이 건네는 가장 오래된 위로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게도 사랑이 아름답기만 했던 적은 많지 않다.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병원에 함께 가야 했고, 연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의 불안을 견뎌야 했으며,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을 포기해야 했던 순간이 있다.

어쩌면 사랑은 행복의 다른 이름만은 아니다.

기꺼이 수고하는 마음이며, 상대의 고통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선택이고, 때로는 함께 우는 일이다.

그래서 예스24가 『서리꽃』을 소개하며 내세운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운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작품의 정서를 압축한다. 책은 한 편의 시와 그림에서 시작된 사랑이 고난의 시간을 지나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이야기한다. 

독자들의 반응도 빠르게 축적되고 있다. 출간 한 달여가 지난 현재 예스24의 『서리꽃』 세트에는 100건이 넘는 회원 평가가 집계되어 있고, 알라딘에서도 전 2권 세트가 높은 판매지수를 기록하고 있다. 다만 독자 평가는 서점별 집계 방식과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판매량보다 오래 남는 것은 작품이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때보다 사랑해야 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내가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지, 타인의 고통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돈과 성공과 체면보다 한 사람을 앞에 놓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감정에서 가치관이 된다.

그래서 『서리꽃』은 젊은 연인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여든셋의 작가가 긴 문학 인생 끝에서 다시 묻는 인간에 관한 질문처럼 읽힌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돈도 필요하고 성공도 필요하다. 안정된 삶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얻고도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충분한가.

서리꽃은 가장 추울 때 피어난다.

인간의 사랑도 어쩌면 그렇다.

좋은 날에 함께 웃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삶이 무너지고 돈이 사라지고 몸이 아프고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도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는 일.

조정래는 그 어려운 선택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앓을 만큼 앓아야 고리가 풀리고, 끊기고 하지요.” — 『서리꽃 』
어떤 상처는 빨리 잊으라는 말로 사라지지 않는다.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하고, 자신의 시간을 통과해야 비로소 놓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서리꽃』의 사랑이 아름다운 까닭도 상처를 건너뛰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힘들고 초라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된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그 사람과 함께 울어줄 수 있을까요?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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