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최정화, 버려진 물건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술의 자리를 다시 묻는 작가
최정화의 작품을 이루는 물건들은 대체로 비싸지 않다. 플라스틱 바구니. 냄비와 주전자. 빗자루. 낡은 가구. 찌그러진 양은그릇. 누군가 사용하다 버린 생활용품. 미술관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것들은 작품이라 불리지 않았던 것들이다. 최정화는 이런 물건을 찾아 시장과 골목, 고물상과 재활용센터를 돌아다닌다. 해외에서 전시할 때도 시장과 민속박물관뿐 아니라 고물상을 찾아다니며 오래된 물건을 모은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대단한 재료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냄비는 여전히 냄비이고. 바구니는 여전히 플라스틱이다. 대신 쌓는다. 섞는다. 크게 만든다. 수백 개, 수천 개를 한곳에 모은다. 그러면 어제까지 하찮았던 사물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여기에서 최정화가 오래 붙잡아온 질문이 시작된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그는 오래전부터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야기해왔다. 자신을 절대적인 창작자라기보다 일상의 사물 안에 숨어 있던 미적·정신적 가능성을 불러내는 ‘매개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최정화에게 예술은 없던 아름다움을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었지만 우리가 보지 않았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하찮음’이 중요하다. 반짝이는 플라스틱은 대리석보다 싸고. 시장 바구니는 조각 작품보다 흔하다. 오래 사용한 냄비에는 흠집과 얼룩이 있다. 하지만 최정화의 손을 거치면 가치의 위계가 뒤집힌다. 고급과 저급. 진짜와 가짜. 작품과 쓰레기. 그 경계가 흔들린다. [연금술] 연작도 그렇다. 멀리서 보면 화려한 유리 조각이나 값비싼 장식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흔한 플라스틱 그릇을 쌓아 만든 경우가 있다.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생활용품뿐 아니라 생활폐기물, 돌, 스티로폼, 민속품, 가구, 유리와 철 등을 모아 다시 쌓아왔다. 여기에는 소비사회에 대한 풍자가 있지만 그것만 남지는 않는다. 최정화는 버려진 사물을 비난의 증거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 물건이 얼마나 많이 생산되고 소비됐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안에 묻어 있는 사람의 생활을 바라본다. 누군가 이 냄비로 밥을 했을 것이고. 이 바구니에 물건을 담았을 것이며. 이 의자에 앉아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사물에는 사람이 지나간 시간이 남아 있다. 그래서 최정화의 작업은 의외로 감정적이다. 다만 슬픔을 슬픈 얼굴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전시장에는 강렬한 색과 거대한 꽃, 장난감 같은 형상과 우스꽝스러운 물건이 넘쳐난다. 감정은 절제되기보다 과장된다. 하지만 그 과장은 무겁지 않다. 아이처럼 크게 만들고. 시장처럼 뒤섞고. 축제처럼 펼쳐놓는다. 그 화려함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버린 물건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작품에서 유쾌함은 현실을 잊게 하는 장식이 아니라, 익숙한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드는 입구다. [민들레]는 이 태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앞에 설치된 [민들레]에는 시민들이 기증한 약 7,000개의 냄비, 주전자 같은 생활용품이 사용됐다. 각각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졌다. 최정화는 여기에서 자신만을 작가라고 부르지 않았다. 물건을 내놓은 시민들도 작품 제작에 참여한 예술가이며, 자신은 그 과정을 연결한 매개자라고 설명했다. 민들레라는 형상도 의미심장하다. 민들레는 귀하게 관리해야만 피는 꽃이 아니다. 길가에서도 자라고. 틈에서도 자라고. 씨앗은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최정화는 민들레를 ‘사람들의 꽃’이라고 설명하며, 이 작품을 개인에서 숲으로 확장되는 공존의 개념과 연결해왔다. 결국 [민들레]를 만든 것은 하나의 위대한 재료가 아니다. 서로 다른 집에서 건너온 평범한 물건들이다. 혼자 있을 때는 오래된 냄비였던 것이 다른 냄비와 만나 거대한 꽃이 된다. 이것은 최정화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닮았다. 완벽한 개인을 상상하기보다 모이고, 섞이고, 부딪치면서 만들어지는 세계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묘한 공감의 지점이 있다. 우리 역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들을 쉽게 버리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낡은 물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래된 취향. 실패했던 경험.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능력.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웠던 시간. 삶에는 스스로 쓸모없다고 분류해놓은 것들이 의외로 많다. 최정화는 그것들을 아름답다고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다시 쌓아본다. 다른 것 옆에 놓아본다. 빛을 비춰본다. 그러면 가치가 달라진다.

그가 말하는 ‘연금술’은 어쩌면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가치 없다고 믿었던 것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최정화가 예술과 삶을 분리하려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예술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며 예술은 일상생활에서 나온다고 말해왔다. 시장과 거리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손길을 전문 예술가의 작업보다 흥미롭게 바라본 적도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미술관 안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이 만지고. 기증하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움직인다. 예술가가 모든 의미를 결정하지 않는다. 관객이 들어와 자신의 기억을 붙인다. 이 지점에서 최정화가 무엇을 말하지 않으려 하는지도 보인다. ‘이것이 예술이다.’ ‘이렇게 감상해야 한다.’ ‘이것은 이런 의미다.’ 그런 권위적인 문장에서 계속 빠져나간다. 자신이 예술을 ‘만든다’기보다 사물이 예술이 되도록 둔다고 말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지금 최정화를 다시 바라볼 이유는 그래서 플라스틱 조각의 화려함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새것을 사고, 너무 빠르게 낡은 것을 버린다. 사물뿐 아니라 이미지와 유행, 관계와 기억까지 빠른 속도로 교체한다. 그런 세계에서 그는 버려진 물건을 줍는다. 그리고 묻는다. 정말 끝난 것인가. 정말 쓸모없는 것인가. 우리가 보지 않았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았던 것인가. 최정화의 작품은 정답을 주기보다 시선을 바꾼다. 쓰레기였던 냄비가 꽃이 되고. 시장 바구니가 조각이 되고. 평범한 시민이 작품의 제작자가 된다. 그 순간 예술과 삶 사이에 있던 높은 문턱도 조금 낮아진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특별한 사람만 발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지나치던 것을 한 번 더 보고. 버리려던 것을 다시 들여다보고.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삶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 최정화의 예술은 그렇게 미술관 밖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생활 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