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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계

양혜규, 경계를 지우는 대신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자리를 만드는 작가

미디어2026. 09. 29
양혜규의 작품에는 이상할 만큼 익숙한 물건이 많이 등장한다.

베네치안 블라인드.

빨래건조대.

전구와 전선.

옷걸이.

방울.

인조 짚.

집 안이나 철물점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전시장으로 들어온 순간 이 사물들은 자신의 용도를 잃는다.

빨래를 널던 건조대에는 전구와 전선이 매달리고, 창문을 가리던 블라인드는 거대한 공간을 나누는 벽이 된다. 금속 방울이 촘촘히 붙은 조각은 누군가 움직이면 소리를 내며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반응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양혜규의 작업에서 일상적·산업적·유사 민속적 재료와 함께 서사와 추상, 가사성, 이주와 경계 같은 문제가 위계 없이 공존한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위계 없이’라는 말이다.

양혜규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중심인지 쉽게 결정되지 않는다.

전통과 현대.

인공과 자연.

한국과 유럽.

공예와 현대미술.

집과 사회.

인간과 사물.

그 사이의 경계가 계속 흔들린다.


양혜규가 오래 붙잡아온 질문은 어쩌면 ‘이것은 무엇인가’보다 ‘이것은 꼭 하나여야 하는가’에 가깝다.

그 질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업 가운데 하나가 [중간 유형]이다.

이 연작의 조각들은 전통적인 바구니 제작이나 직조 방식을 떠올리게 하지만 천연 짚 대신 산업적으로 생산된 인조 짚을 사용한다.

모습도 묘하다.

사람 같기도 하고.

동물 같기도 하고.

민속 신앙 속 존재 같기도 하며.

미래에서 도착한 기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를 생명체와 기계, 사물과 인간 사이 어딘가에 놓인 ‘조각-존재’로 설명한다.

그런데 양혜규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결정해주지 않는다.

관객은 자꾸 이름을 붙이고 싶어진다.

괴물.

정령.

로봇.

토템.

하지만 어느 하나도 충분하지 않다.

그 애매함이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류하기 때문이다.

국가.

성별.

직업.

세대.

문화.

정상과 비정상.

우리와 타인.

분류는 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틀에 들어가지 않는 존재를 불편하게 만든다.


양혜규의 조각은 바로 그 불편한 중간에 머문다.

완전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존재들은 불완전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공간을 차지한다.

양혜규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 역시 이와 닮았다.

그의 작품에는 슬픔이나 기쁨을 직접 설명하는 얼굴이 거의 없다.

대신 온도와 바람이 있고.

빛과 냄새가 있고.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시선이 있고.

움직일 때마다 울리는 방울이 있다.

감정은 이야기보다 감각으로 도착한다.

관객이 작품 사이를 걸으며 자신의 몸으로 먼저 느끼게 하는 것이다.

블라인드는 이 방식의 대표적인 재료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해온 베네치안 블라인드는 공간을 막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막지 않는다.

사람의 모습은 가리지만 빛과 공기는 통과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공간을 만든다.

양혜규의 작품에서 경계는 누군가를 완전히 갈라놓는 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희미하게 감지되는 장소가 된다.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이동’과도 연결된다.



양혜규는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해왔고, 작품 안에서도 이주와 망명, 이동과 소속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뤄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을 단순한 ‘한국적 미술’이나 ‘이주자의 미술’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2025년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어떤 유형의 작가라고 객관화하는 일을 자신의 역할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새로운 영향을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 있고 좋은 청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태도는 작품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의 무속.

일본 신토의 종이 장식.

유럽의 이교 전통.

멕시코의 종이 공예.

모더니즘 미술.

산업 생산품.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한 것들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만난다.

하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한국적인 것이 서양적인 것을 이기지도 않고, 전통이 현대보다 더 진실하다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묘한 공감의 지점이 생긴다.

사람 역시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가족이고.

다른 곳에서는 노동자이며.

누군가에게는 이방인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장 익숙한 사람이다.

어제까지 확신했던 자신이 오늘은 낯설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하나의 대답을 요구받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에 속하는가.

어느 편인가.

무엇을 믿는가.

양혜규의 작품은 그 질문에 서둘러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답하지 않은 상태 자체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겨둔다.



이 태도는 [소리 나는 조각]에서도 흥미롭게 나타난다.

금속 방울이 붙은 조각은 가만히 있을 때는 침묵한다.

움직여야 소리가 난다.

누군가 밀거나 돌리고, 공간을 이동시킬 때 비로소 수많은 방울이 서로 부딪친다.

소리는 조각 안에 미리 완성되어 있지 않다.

관계가 생겨야 발생한다.

사람도 어쩌면 비슷하다.

혼자 있을 때의 나와 누군가를 만났을 때의 나는 다르다.

관계는 때로 우리를 흔들지만, 그 흔들림 때문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생기기도 한다.

2024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대규모 서베이 [Leap Year]는 양혜규의 이런 세계를 약 30년에 걸쳐 다시 펼쳐 보였다.

블라인드와 방울, 빨래건조대와 종이, 빛과 냄새, 움직이는 조각들이 한 공간에서 만났다.

그리고 2025년 전시는 로테르담과 취리히으로 이어졌으며, 같은 해 미국 댈러스에서는 [Lost Lands and Sunken Fields]를 통해 새로운 작업도 계속됐다.

지금 양혜규를 다시 바라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오래전부터 우리가 지금 더 자주 마주하는 문제를 다뤄왔다.

이동하는 사람.

여러 문화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사람.

하나의 이름으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

세상은 점점 더 연결되지만 우리는 동시에 사람을 더 빠르게 분류한다.

양혜규는 그 분류를 거부한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분류하기 어려운 존재를 계속 만들어 우리 앞에 세운다.

그리고 바라보게 한다.

낯선데 익숙하고.

인공적인데 원시적이며.

기계 같으면서 살아 있는 것 같은 존재를.

어쩌면 소속되지 못했다는 감각은 결핍이 아니라, 여러 세계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인지도 모른다.

양혜규의 작업은 그것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이동에는 불안이 있고.

경계에는 긴장이 있으며.

타인을 만나는 일에는 충돌이 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존재는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

방울은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만들고.

블라인드 사이로 빛은 지나가며.

낯선 재료들은 하나의 조각 안에서 함께 버틴다.

양혜규가 만드는 것은 완벽하게 화해한 세계가 아니다.

다른 것들이 다른 채로 함께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서 남는 질문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에서 조금 달라진다.

꼭 하나의 곳에만 속해야 하는가.

“It’s my job as a sculptor.”
2024년 인터뷰에서 양혜규는 쉬운 방법을 경계하며, 재료나 방법을 만났을 때 가능한 한 자신에게 까다로운 과제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료가 방향을 결정하면 자신은 그 가능성을 따라간다고 말했다. 완성된 답을 재료에 강요하기보다 낯선 가능성이 생겨나는 과정을 따라가는 그의 작업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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