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정연두, 평범한 사람의 꿈에서 백 년 전 이름 없는 사람의 기억까지 상상을 통해 현실의 바깥을 바라보는 작가
한 사람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유니폼을 입고 카운터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북극에 가고 싶은 꿈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연두의 초기 연작 [내 사랑 지니(Bewitched)]는 바로 그 간격에서 출발한다. 그는 일상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에게 꿈을 물었다. 그리고 한 장에는 그들의 현실을, 다른 한 장에는 그들이 원하는 삶을 실제 세트와 의상, 소품을 이용해 만들어 촬영했다. 주유소 직원은 레이서가 되고,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은 북극을 여행한다. 포토샵으로 꿈을 합성한 것이 아니다. 잠깐이라도 현실 속에 그 꿈을 만들어놓고 그 사람을 그곳에 세웠다. 여기에서 정연두가 오랫동안 붙잡아온 질문 하나가 보인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만으로 한 사람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유명하지 않다. 아파트에 사는 가족, 춤을 좋아하는 중년의 사람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 [보라매 댄스홀]에서는 낡은 비행기 격납고가 무도장이 된다. 배가 나오고 머리가 희끗해진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고친 드레스를 입고 왈츠를 춘다. 모든 것이 조금 어설프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춤춘다. 정연두는 그 어설픔을 지우지 않는다. 완벽한 무도장을 만들어 그들을 영화배우처럼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몸과 낡은 공간, 조금 부족한 의상과 낭만적인 음악을 함께 둔다.

그에게 환상은 현실을 지워야 나타나는 세계가 아니라, 현실 위에 아주 얇게 겹쳐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따뜻하지만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꿈을 이루면 행복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사랑 지니]의 꿈은 사진을 찍는 순간 잠시 현실이 되지만 촬영이 끝나면 세트는 사라진다. 그 사실을 작가도 알고, 사진 속 사람도 알고, 관객도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허구 때문에 현실 속 인물이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이 더 이상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연두가 바꾸는 것은 사람의 현실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그 질문은 이후 사람에서 이미지 자체로 이동한다. [로케이션]에서 그는 실제 자연 속에 인공조명과 영화 세트 같은 장치를 끌고 들어간다. 진짜 풍경을 오히려 가짜 영화 세트처럼 촬영한다. 관객들은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찾으려 하지만, 정연두는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실재하는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미지 역시 이미 수많은 기억과 영화, 광고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에서는 그 제작 과정마저 숨기지 않는다. 85분 동안 카메라는 거의 한자리에 머물고 편집도 없다. 사람들이 들어와 방을 만들고, 다시 철거한다. 논과 들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풍경이 만들어진다. 보통 영화라면 잘라냈을 세트 교체와 노동의 시간이 그대로 작품 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지루하다. 정연두 역시 관객이 일정한 지루함을 넘어가면 자신이 ‘두 번째 지루함’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그때부터 관객은 작품이 주는 정보를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기억과 어린 시절, 이미지와 연결된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정연두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다. 감정을 크게 지시하지 않는다. 슬픈 음악으로 슬픔을 명령하지 않고, 극적인 편집으로 감동해야 할 순간을 정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과정과 빈틈을 보여준다. 관객이 그 틈에 자신의 기억을 가져다 놓도록 기다린다. 그런 그의 관심은 최근 작업으로 오면서 더 먼 곳으로 움직였다.

[백년 여행기]는 1905년 멕시코로 떠났던 한인 이주자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정연두는 그들을 민족의 수난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 넣는 데 머물지 않았다. 이주민 개인의 기록과 식물의 이동, 판소리와 일본의 기다유 분라쿠, 멕시코 마리아치를 한 공간에서 겹쳐놓았다. 그가 중요하게 이야기한 것은 ‘공감’이었다. 자신과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멀어진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쉽게 타인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정연두가 길에서 만난 한 사람에게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면, 지금의 그는 백 년 전의 사람에게 비슷한 질문을 건네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그들을 ‘멕시코 한인 이민자’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그 집단 안에도 각자의 사랑과 두려움, 기대와 실패가 있었을 것이다. 거대한 역사는 언제나 사람을 숫자로 만든다. 정연두는 다시 그 숫자를 사람의 크기로 돌려놓는다. 그의 작업은 결국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상상력을 건네는 일이다. 상상은 여기에서 현실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기록되지 않은 현실에 가까이 가는 방법이 된다. 그래서 정연두의 작품에는 묘한 공감의 지점이 있다.

우리 역시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간다. 직업으로 설명되지 않는 욕망이 있고. 가족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꿈이 있고. 결국 이루지 못한 미래가 있다. 그것들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정연두는 바로 그 부분을 이미지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그의 작업을 다시 바라볼 이유다. 이미지는 어느 때보다 매끄러워졌다. 사진 한 장에서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는 일조차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 시대에 정연두는 오히려 가짜를 숨기지 않는다. 세트를 보여주고. 장치를 보여주고. 풍경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그 이미지가 어떤 사람의 기억과 욕망을 바라보게 하는가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가 좀처럼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그래서 ‘이것이 진실이다’라는 단정이다. 현실과 환상. 기억과 기록. 개인과 역사. 한국과 멕시코. 그 사이에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는 공간이 남는다. 정연두는 그 공간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그곳에 오래 머물게 한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삶 하나를 조금 더 오래 상상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