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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이해할 수 없어서, 더 오래 바라보는 사람

신유청,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과 침묵 사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을 묻는 연출가

미디어2026. 09. 29
신유청의 작품에는 자주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사람.

사회가 존재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

전쟁과 폭력으로 삶이 망가진 사람.

질병 때문에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와이프], [빈센트 리버], [그을린 사랑],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이어놓으면 서로 다른 이야기 사이에서 하나의 방향이 보인다.

신유청 자신도 작품을 볼 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고 말했다. 소수자와 차별 속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연극이 그들을 ‘불쌍한 사람’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들에게도 욕망이 있고, 이기심이 있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

신유청은 상처받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대신, 상처받은 사람도 여전히 복잡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남겨둔다.

그 태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 중 하나가 [그을린 사랑]이다.

전쟁과 종교적 갈등, 성폭력과 가족의 비극이 뒤엉킨 작품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관객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목격한다.

이 정도의 비극이라면 연출가는 감정을 더 크게 밀어붙일 수도 있다.



신유청은 반대로 갔다.

연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무대에 ‘침묵’을 채웠다. 관객에게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알려주기보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남겨두려 했다.

그의 작품에서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흥미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은 강렬하지만 연출은 사건보다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잔혹한 장면을 더 잔혹하게 만드는 대신 그 폭력 아래 무엇이 있는지를 찾는다. 신유청은 잔인함과 폭력을 무대에서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고민하면서도, 작가가 쓴 폭력적인 사건의 ‘밑바닥’을 찾아내는 것이 연출의 일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 밑바닥에서 반복해서 발견하는 것은 사랑이다.

조금 낯선 결론이다.

전쟁과 혐오와 폭력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사랑은 따뜻한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와이프]를 이야기하면서 그는 사회적 올바름을 실현하는 데에도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고, 자신의 올바름이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나는 옳은가가 아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와이프]는 여러 시대를 통과하며 성소수자의 삶과 관계를 바라보고, [빈센트 리버]는 혐오 범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을 따라간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는 에이즈가 확산되던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동성애자, 유대인, 흑인, 모르몬교도 등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부딪힌다.



신유청은 이 작품들을 통해 혐오를 특별히 잔인한 사람들의 문제로만 만들지 않는다.

편견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있다.

선량하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에도 생긴다.

그의 연극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나는 편견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두고 그는 ‘우리 안의 장벽’에 관해 이야기했다.

신유청에게 이 작품은 갑자기 등장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그을린 사랑], [와이프], [녹천에는 똥이 많다], [빈센트 리버]를 거쳐온 경험이 마치 [엔젤스 인 아메리카]를 만나기 위한 과정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전 작업에서 쌓은 지식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법까지 이 작품 안으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이 말에서 신유청이 연극을 대하는 또 하나의 태도가 보인다.

작품을 끝내고 버리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에서 생긴 질문이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혐오를 바라보다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생각하다 타인을 이해하는 문제로 넘어가고.

그 질문은 다시 공동체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로 확장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쉽게 완성되는 사람이 없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린다.

진흙이 묻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누군가를 배신한다.

그런데도 살아낸다.



신유청은 [와이프]를 이야기하면서 물에 빠지면 어떻게든 헤엄쳐야 하고 진흙이 묻더라도 살아내는 모습 자체가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가 건네는 공감은 이 지점에 있다.

삶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상처를 극복한 사람과 극복하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지도 않는다.

사람은 때로 상처를 그대로 가진 채 살아간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인물들도 고통이 사라져서 앞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고, 주어진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힘을 조금씩 얻는다.

그렇다면 회복은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상처 이후의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새롭게 배우는 일에 더 가깝다.

신유청의 연극이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완전히 놓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그을린 사랑]에서 삶의 희극과 비극을 함부로 나누기 어렵다고 말했다. 작품이 너무 무거워 ‘두 번은 못 보겠다’는 관객 반응을 보면서도, 오히려 다시 보고 곱씹을 수 있기를 바랐다.

비극을 소비하고 극장을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가지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신유청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혐오, 차별, 전쟁, 정체성의 문제는 특정 시대에 끝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빠르게 분류하고, 자신의 올바름을 빠르게 선언하는 지금 더 복잡해졌다.

신유청은 그 문제 앞에서 정답을 먼저 내놓지 않는다.

연출가의 해석으로 모든 것을 덮지도 않는다.

[와이프]를 연출하며 그는 자신이 작품에 특별한 것을 덧붙였다기보다 작가가 계산해놓은 세계를 “아름다운 마음으로 같이 들여다봤을 뿐”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나는 안다’라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왜 저러는지 안다.

누가 옳은지 안다.

무엇이 해결책인지 안다.

그런 빠른 결론 대신 신유청은 극장의 시간을 사용한다.

세 시간, 네 시간, 때로는 두 작품을 합쳐 여덟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을 바라보게 한다. 그는 한 시간짜리 공연도 지루할 수 있고 네 시간이 좋은 만남이 될 수도 있다며, 극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이해란 상대를 완전히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쉽게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간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유청의 연극은 바로 그 시간을 만든다.

말이 멈춘 자리.

배우가 숨을 쉬는 순간.

관객이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시간.

그 침묵 속에서 타인은 더 이상 설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뒤 질문은 무대에서 객석으로 넘어온다.

나는 누군가를 얼마나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인가.

“앎의 확장은 결국 사랑이다.”
신유청이 [그을린 사랑]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한 문장이다. 타인을 더 많이 안다는 것이 지식을 축적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그의 연극관을 압축한다.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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