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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슬픔을 슬프게만 말하지 않는 사람

고선웅, 웃음과 놀이를 지나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묻는 연출가

미디어2026. 09. 28
고선웅의 연극은 얌전하지 않다.

배우들은 무대를 뛰어다니고, 언어는 빠르게 쏟아진다. 말장난과 슬랩스틱이 등장하고, 죽음 바로 옆에서도 농담이 튀어나온다.

[칼로막베스]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무협액션과 슬랩스틱을 만나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는 한 집안이 몰살당하는 참극 한가운데 풍자와 해학이 끼어든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서는 외설적으로 소비되던 고전이 한 여성의 생명력에 관한 이야기로 방향을 바꾼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웃기게 만드는 것일까.

고선웅은 [푸르른 날에]를 이야기하면서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우는 것은 관객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일부러 어긋나게 만들고, 그 비틀림을 통해 관객과 줄타기를 한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고선웅에게 웃음은 비극에서 도망치는 방법이 아니라, 비극을 더 오래 바라보기 위한 방법에 가깝다.

[푸르른 날에]는 5·18 광주라는 역사적 비극을 다룬다.

그런데 고선웅이 이 작품에서 붙잡은 것은 비극 자체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 작품의 본질을 암울한 시대에도 피어나는 ‘사랑’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역사적 사건의 무게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대신 그 안에서 사랑했던 사람, 살아남은 사람, 기억해야 하는 사람을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무대에서 감정은 직선으로 가지 않는다.

슬픈 장면이라고 배우에게 계속 울게 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연습 초반에는 배우가 충분히 울도록 둔 뒤, 시간이 지나 울음이 소진되면 다른 표현을 찾는다고 말했다.

울어야 할 순간에 웃기도 하고.

절규해야 할 순간에 가만히 있기도 한다.

관객이 울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농담 하나가 끼어든다.

그러다 방심한 순간 비극이 다시 돌아온다.

그 어긋남 때문에 감정은 오히려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언제나 슬픔에 맞는 표정을 짓고 살지는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하다 웃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순간에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은 비극 속에서도 밥을 먹고, 농담하고, 사랑한다.

고선웅의 연극은 바로 그 모순을 지우지 않는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작은 충절과 복수를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고선웅은 복수가 끝난 다음을 바라본다.

20년 동안 복수 하나를 위해 살아온 정영은 마침내 목적을 이루지만 기뻐하지 못한다.

남은 것은 공허다.

고선웅은 이를 두고 복수가 끝나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편안해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질문은 ‘복수에 성공할 것인가’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복수를 이루고 나면 인간에게 무엇이 남는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면, 그 미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

 고선웅은 사건의 결말보다 사건을 통과한 인간에게 무엇이 남았는지를 오래 바라본다.

그의 고전 각색이 흥미로운 것도 이 때문이다.

원작을 현대적인 장식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원작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가치에 작은 질문을 집어넣는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서는 제목부터 변강쇠에 ‘점’을 찍어 밀어내고 옹녀를 앞으로 데려왔다.

원전에서 남성들의 죽음을 몰고 다니는 여성처럼 취급됐던 옹녀는 그의 무대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끌고 가는 사람이 된다. 고선웅은 당시 변강쇠보다 옹녀에게 중심을 두었고, 작품은 원전의 비극적 결말을 넘어 옹녀의 생명력과 희망을 강조했다.

[귀토]도 비슷하다.

[수궁가]는 토끼가 용궁에서 살아 돌아오며 끝난다.

고선웅은 그다음을 상상했다.

토끼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 아들은 어떤 세상을 살아갈까.

그렇게 만들어진 토자는 부모를 잃고 자신의 터전을 떠나 더 좋은 세상을 찾아가지만, 결국 자신이 살아갈 곳은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선웅은 2026년 재연을 앞두고 “지금 발 딛고 있는 곳에서 자유와 보람을 찾는 것이 인생의 덕”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공감의 방향과도 닿아 있다.

그는 인생이 잘 풀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계속 곤경에 빠뜨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복수에 사로잡히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더 나은 곳을 찾아 떠났다가 다시 실패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인간은 이상하게 살아간다.

농담하고, 사랑하고, 다시 밥을 먹는다.


 고선웅이 보여주는 희망은 그래서 밝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기보다 망가진 세계에서도 삶은 이상할 만큼 계속된다는 사실에 가깝다.

그는 재미 역시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 없는 공연은 가짜”라고 말할 정도로 관객이 작품 안으로 들어오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연극의 ‘놀이’를 다른 매체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성으로 보고, 관객을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공연에 참여하는 주체로 바라보는 태도 역시 그의 작품에서 반복된다.

여기에는 예술을 어렵게 만들어야 깊어진다는 생각에 대한 작은 반론이 있다.

고선웅은 본질을 고민하지만 본질을 무겁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유행을 쫓느니 본질에서 방황하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자신의 고집만을 밀어붙이기보다 관객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사이의 ‘줄타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이 균형이 지금 고선웅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2026년 그는 16년 만에 [칼로막베스]를 다시 무대에 올렸고, [귀토] 역시 4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칼로막베스]에서는 권력과 생존을 위해 칼을 드는 인간의 욕망을 무협액션과 슬랩스틱으로 풀었고, [귀토]에서는 초연의 군더더기를 걷어내며 자신 역시 “세월이 흐르며 철이 들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과거 작품을 정답처럼 보존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고친다.

덜어낸다.

다른 배우에게 맡긴다.

지금의 자신이 다시 묻는다.



그래서 고선웅의 연극에는 좀처럼 마지막 답이 없다.

복수는 정의로운가.

사랑은 비극을 이길 수 있는가.

고향을 떠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인간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는 답을 설명하기보다 사람들을 무대 위에 던져놓는다.

그리고 웃긴다.

싸우게 한다.

쓰러뜨린다.

다시 일으킨다.

그 소란스러운 무대가 끝나고 객석이 조용해졌을 때, 이상하게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끔찍한 일을 겪고도 우리는 왜 다시 살아가는가.

아마 고선웅의 연극은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 살아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행을 쫓느니 본질에서 방황하겠다.”
고선웅이 극공작소 마방진 10주년을 맞아 자신의 작업 태도를 이야기하며 남긴 말이다. 새로운 형식을 끊임없이 시도하면서도 결국 그가 돌아가는 곳이 인간과 연극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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