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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오래된 소리는 박물관에 있지 않는다

김준수,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소리꾼

미디어2026. 09. 28
판소리에는 오래된 것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한복을 입고,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이야기를 부르는 음악.

그런데 김준수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이 익숙한 풍경이 조금씩 흔들린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판소리를 하고, 그리스 신화 속 헬레네가 우리 소리로 자신의 비극을 말한다. [패왕별희]에서는 남성 소리꾼이 우희가 되어 칼춤을 추고, [칼로막베스]에서는 다시 여성 인물로 연극 무대에 선다.

그런데 김준수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의외로 변화가 아니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무대를 경험하면서도 “우리 소리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이야기해왔고, 자신의 정체성 역시 결국 판소리에 있다고 말한다. 2023년에는 바쁜 활동 중에도 10년에 걸쳐 여섯 시간 분량의 [춘향가] 공부를 마쳤다고 밝혔다.

여기에서 김준수의 작업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역설이 생긴다.

새로운 곳으로 계속 움직이지만 뿌리에서는 멀어지지 않는다.

그에게 전통은 움직이지 않기 위해 붙잡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움직이기 위해 딛는 바닥에 가깝다.



김준수 역시 처음에는 우리 소리에는 [춘향전], [수궁가], [심청가]처럼 한국의 고전 이야기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립창극단에서 [메디아], [트로이의 여인들] 같은 서양의 이야기를 경험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자신도 모르게 판소리의 가능성에 한계를 두고 있었다고 돌아봤다.

이후 그의 작업은 그 한계를 하나씩 확인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중 가장 선명한 작품이 [패왕별희]다.

김준수가 맡은 우희는 사랑하는 항우와 이별을 앞둔 여성이다. 그런데 그는 우희의 슬픔을 표현하면서 판소리가 가진 힘을 무작정 크게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소리꾼의 힘찬 발성과 달리 우희에게서는 자신의 목소리 안에 있는 부드러움을 찾았고, 슬픔 역시 밖으로 터뜨리기보다 누르면서 노래하려 했다고 말했다.

판소리의 감정은 흔히 폭발적이다.

한과 흥이 몸을 타고 올라오고, 목소리는 객석 끝까지 밀려간다.

하지만 김준수의 우희는 반대로 힘을 덜어낸다.

울부짖을 수 있는 순간에 눌러 부르고, 큰 몸짓 대신 손끝과 작은 보폭을 선택한다. 경극의 정형화된 움직임을 익히기 위해 연습실에서도 치마를 입고 걸음과 손동작을 반복했다.

그래서 그의 감정은 과장과 절제 중 하나에 머물지 않는다.

필요하면 폭발하고, 필요하면 물러난다.


감정을 크게 표현하는 것보다 그 인물에게 어떤 크기의 감정이 필요한지를 먼저 묻는다.

이 태도는 성별을 넘나드는 그의 배역에서도 발견된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헬레네, [패왕별희]의 우희, 그리고 [칼로막베스]의 여성 인물까지.

그는 남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 자체를 특별한 선언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과거 인터뷰에서도 남자에게 여성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부분을 어떻게 끌어내느냐라고 말했다.

리어왕을 연기할 때도 비슷했다.

노인을 연기하기 위해 노인을 흉내 내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리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누군가의 리어를 따라가기 시작하면 흉내 내기에 급급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준수의 무대가 반복해서 묻는 질문은 그래서 결국 하나로 모인다.

‘원래 그래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판소리는 한국 고전만 불러야 하는가.

리어왕은 반드시 늙어야 하는가.

여성은 여성 배우만 표현할 수 있는가.

전통은 옛 모습 그대로 있어야 전통인가.

그는 이런 질문에 거창한 선언으로 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직접 해본다.

소리를 내보고,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몸짓을 배우고,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무대에 올라간다.



2026년 [칼로막베스]를 앞두고 한 말도 그래서 인상적이다. 그는 관객에게 ‘김준수의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자신의 지속적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많은 역할을 경험한 사람이 완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지금 김준수를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전통과 현대를 연결한다는 익숙한 수식어보다 조금 더 복잡한 위치에 서 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포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통 안에 원래부터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자신의 몸으로 확인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묘한 공감의 지점이 있다.

사람 역시 자신을 너무 빨리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고.

이것은 나와 어울리지 않고.

지금 시작하기에는 늦었고.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김준수의 무대는 그런 문장들을 직접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남성의 몸으로 우희가 되고, 젊은 몸으로 리어가 되고, 판소리로 셰익스피어를 부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질문 하나가 자연스럽게 남는다.

우리가 ‘나답다’고 믿었던 것은 정말 나의 본질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오래 반복해서 익숙해진 모습이었을까.

뿌리를 가진다는 것은 한자리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돌아올 곳을 알기 때문에 더 낯선 곳까지 갈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김준수는 자신의 뿌리가 소리라는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바로 그 확신 때문에 그는 판소리 밖으로 계속 걸어 나갈 수 있다.

뮤지컬을 만나고, 경극을 만나고, 셰익스피어를 만나고, 연극을 만난다.

그리고 다시 소리로 돌아온다.

그때 돌아온 소리는 이전과 같지 않다.

다른 몸과 다른 장르와 다른 세계를 지나온 만큼 조금 더 넓어져 있다.

오래된 것을 살아 있게 만드는 방법은 어쩌면 그것일 것이다.

그대로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사용하고, 부딪치고, 질문하고, 다시 부르는 것.

김준수에게 판소리는 과거에서 건너온 음악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음악이다.

“인기가 아무리 높아져도 내 정체성은 판소리”
2024년 자신의 공연 [창(唱): 꿈꾸다]를 앞두고 김준수가 밝힌 말이다. 다양한 장르로 움직이면서도 그 모든 실험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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