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박정민, 부족함을 감추지 않고 그것을 계속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사람
박정민의 인물들은 이상하게 완벽하지 않다. [파수꾼]의 희준은 상처받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동주]의 송몽규는 뜨거운 신념을 가졌지만 시대 앞에서 흔들린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유이는 거대한 액션의 세계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간절히 살아내는 사람이고, [하얼빈]의 우덕순은 역사책 속 영웅이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가진 한 인간이다. 박정민은 이런 인물들을 쉽게 멋있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무엇이 부족한 사람인지 오래 들여다본다. 그의 연기에서 반복되는 질문은 어쩌면 이것에 가깝다. ‘나는 이 사람을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주]에서 송몽규를 맡았을 때 그는 관련 자료뿐 아니라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대전과 대공황에 관한 자료까지 찾아봤다. 대사를 외워 흉내 내는 것과 알고 연기하는 것 사이에는 진정성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공부할수록 송몽규를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멀어졌다고 했다. 그 거리가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물에게 가까이 간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유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것은 반복된다. 그는 트랜스젠더인 유이를 준비하며 당사자들의 삶을 공부했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영화 한 편을 위해 관찰하고 분석하는 행동 자체가 무례할 수도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결국 자신이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 인정했다. 그래서 유이는 과장되지 않는다. 캐릭터의 특수성을 전면에 내세워 관객에게 쉽게 소비시키기보다 한 사람의 생활과 욕망을 남긴다. 홍원찬 감독 역시 박정민이 유이를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표현한 점을 짚었다. 여기에서 박정민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보인다. 감정을 크게 만드는 것보다 감정이 발생할 이유를 먼저 찾는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절제와 폭발을 오간다. [동주]에서 송몽규의 절규가 강렬했던 것은 영화 내내 큰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 아니다. 오래 눌러놓았던 시대와 개인의 감정이 마지막에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얼빈]의 우덕순은 최대한 감상에 치우치지 않게 만들려고 했다. 독립운동가라는 이름 앞에서 인물을 숭고함으로만 포장하지 않았다. 박정민이 주목한 것은 그들이 영웅이기 전에 누군가의 자식이고 남편이며 아내였다는 사실, 그리고 거대한 일을 앞두고 두려워했을 평범한 인간의 마음이었다. (다음) 우덕순에게서는 특히 외로움을 발견했다. 늘 누군가의 옆을 지키고 지지하는 사람이 오히려 외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인물을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다고 말했다. (다음) 이 문장은 박정민의 작품 세계를 묘하게 관통한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자주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사람이 있다. 송몽규도 그랬고, 희준도 그랬으며, 우덕순 역시 그렇다. 모두가 바라보는 사람보다 아무도 오래 바라보지 않았던 사람에게 한 번 더 시선을 두는 것. 배우 박정민과 글을 쓰는 박정민이 만나는 곳도 여기다.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천재적인 배우로 설명하지 않았다. [동주] 당시 인터뷰에서는 자신에게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치열하게 연기한다고 말했다. 다른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연기가 완성됐다고 생각하거나 자신감에 차는 순간 나태해질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자기인식은 묘하게 그의 글쓰기와도 닮아 있다.

박정민의 에세이 제목은 [쓸 만한 인간]이다. ‘훌륭한 인간’도, ‘성공한 인간’도 아니다. 쓸 만한 인간. 그 표현에는 자신을 과장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유머가 있지만, 동시에 꽤 진지한 삶의 태도가 숨어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어딘가에 쓰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모든 것을 잘하지 않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찾는 것. 배우뿐 아니라 글을 쓰고 출판이라는 영역으로 자신의 활동을 넓혀온 행보를 보면, 박정민에게 창작은 하나의 직함을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만들어갈 방법을 찾는 일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에게 멈춤 역시 실패가 아니다. 2024년 여러 작품을 연달아 촬영한 뒤 그는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이 이전에 사용했던 표정을 다시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익숙해졌다는 것은 보통 프로가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박정민은 반대로 그 익숙함을 경계했다. “썼던 표정을 다시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잠시 멈추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다음) 그에게 성장은 더 많이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익숙해진 자신을 의심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 박정민을 다시 바라보는 일은 흥미롭다. 이미 인정받은 배우가 되었는데도 그는 자신이 나온 영화를 편하게 다시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더 잘할 수 있었던 장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동주] 역시 자신이 잘해서 사랑받았다기보다 송몽규라는 인물의 삶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라고 공을 인물에게 돌린다.

그의 말에는 좀처럼 ‘완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배우다. 나는 이것을 잘한다. 이제 내 방식은 이것이다. 그런 선언보다 아직 모르겠다는 말, 더 해볼 수 있었다는 아쉬움, 다음에는 다르게 해보고 싶다는 태도가 남는다. 그래서 박정민의 작업에서 발견하게 되는 공감은 성공한 사람의 조언과 조금 다르다. 잘하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고, 질투했고, 자신감이 없었고, 자신이 만든 결과를 다시 보는 일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지우지 않는다. 그런데도 다음 작품을 한다. 글을 쓴다. 책을 만든다.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것 쪽으로 움직인다. 어쩌면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거대한 확신이 아니라 이런 작은 움직임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조금 더 해볼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서 움직이는 것. 박정민을 배우와 작가, 출판인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이름들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그래서 하나의 동사다. 계속 해보는 사람. 자신의 부족함을 없앤 뒤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채로 읽고, 쓰고, 연기하고, 다시 고치는 사람. 그렇게 보면 ‘쓸 만한 인간’이라는 말은 겸손한 농담만은 아니다. 완벽한 인간이 되겠다는 약속보다 조금 현실적이고, 그래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