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김아영이 가상세계와 기술의 언어로 현실의 속도를 다시 묻는 법
김아영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질문이 반복해서 돌아온다. “우리는 정말 스스로 선택하며 움직이고 있는가.” 그의 화면에는 게임과 인공지능, 가상현실, 평행세계가 등장한다. 도시의 공간은 뒤틀리고 시간은 갈라지며, 현실과 시뮬레이션의 경계도 쉽게 무너진다. 언뜻 보면 먼 미래의 이야기 같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이상할 만큼 익숙하다. 스마트폰이 목적지를 알려주고, 알고리즘이 가장 빠른 길을 계산한다. 플랫폼은 사람에게 점수를 매기고, 우리는 그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인다. 김아영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다. 이미 시작된 현재다.


그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딜리버리 댄서의 구]다. 주인공 에른스트 모는 배달 플랫폼 ‘딜리버리 댄서’의 라이더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댄스마스터’라는 알고리즘이다. 더 빠른 길. 더 효율적인 움직임. 더 짧은 시간. 배달은 노동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하나의 안무처럼 보인다. 라이더는 도시를 가로지르고 몸을 움직이며 알고리즘이 만든 경로를 수행한다. 제목이 ‘배달 노동자’가 아니라 ‘딜리버리 댄서’인 이유가 여기에서 묘하게 드러난다. 노동과 춤의 경계가 흐려진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움직임은 계산되어 있다. 김아영이 바라보는 기술의 문제는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보다, 인간이 점점 기계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는 현재에 가깝다. 에른스트 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늦으면 평가가 떨어진다. 평가가 떨어지면 플랫폼에서 밀려난다. 따라서 그의 몸은 쉬지 않고 최적화되어야 한다. 여기서 시간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다. 플랫폼이 시간을 계산하고 알고리즘이 속도를 결정한다. 이것은 공상과학적 설정이지만, 작품의 출발점은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확대된 한국의 배달 플랫폼 노동이었다. 우리가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누르면 음식과 물건이 문 앞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 편리함 뒤에서 누군가는 계속 달린다. 김아영은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미래의 이미지로 확대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현실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현실을 해체한다.

실사 영상과 게임 엔진을 결합하고, 삼차원 애니메이션과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를 뒤섞는다. 이후 [딜리버리 댄서] 세계는 게임과 다채널 영상 등 다른 매체로 계속 갈라져 나간다. 작가는 이런 방식을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가능성과 연결해 설명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하나의 화면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식 자체가 작품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하나의 현실만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선택을 한 세계가 있을 수 있고, 다른 시간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딜리버리 댄서의 구]에서 에른스트 모가 자신과 닮은 엔 스톰을 만나는 순간도 그래서 중요하다. 엔 스톰은 다른 가능세계에서 온 또 하나의 존재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이름을 재배열하면 모두 ‘괴물’을 뜻하는 단어가 된다. 그 만남 이후 시간은 흔들린다. 효율적으로 움직이던 세계에 오류가 생긴다. 배달은 늦어지고 평가가 떨어진다. 알고리즘이 원하는 완벽한 움직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로 그 오류 속에서 관계가 발생한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하고 이야기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효율의 관점에서는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그런 시간 속에서 생겨난다. 김아영의 작품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도 독특하다. 그는 감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눈물이나 고백보다 속도와 거리, 반복과 오류를 통해 감정을 만든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 시간이 달라지고, 멀어지면 공간이 다시 확장된다. 감정은 그의 작품에서 마음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 자체를 뒤틀어버리는 사건이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묘한 쓸쓸함이 있다. 화면은 미래적이고 기술은 화려하지만, 그 안의 존재들은 끊임없이 이동한다. 목적지는 있지만 도착은 없다. 다음 임무가 계속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낯설지 않다. 메일을 확인하고, 다음 일정을 보고, 다시 메시지를 확인한다. 하나를 끝내면 또 다른 알림이 도착한다.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댄스마스터’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김아영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공감은 기술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기술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악으로 규정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게임 엔진과 가상현실, 생성형 인공지능 같은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관계다. 누가 시간을 설계하는가. 누가 경로를 결정하는가. 누구의 노동이 보이고 누구의 노동은 사라지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시스템 속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가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명확한 정답이다. 기술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인공지능은 인간을 구할 것인가 위협할 것인가. 김아영은 그런 이분법에 머물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관객을 그 안에 집어넣는다. 직접 움직이고, 길을 잃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최근의 [딜리버리 댄서의 아크] 연작에서는 이 질문이 시간 자체의 권력으로 확장된다. 시간을 통제하고 재배열하는 존재들이 등장하고, 에른스트 모는 그 질서에 저항한다. 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결국 삶의 속도와 순서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누가 빨리 움직여야 하는지. 누가 기다릴 수 있는지. 누구에게 휴식이 허락되는지. 그 질문은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온다. 지금 김아영을 다시 집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이 예술의 새로운 재료가 된 시대에 많은 질문은 ‘인공지능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에 머문다. 하지만 김아영의 작업은 한 단계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 기술이 이미 인간의 감각과 노동, 시간과 관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미래는 예언이 아니다. 현재를 낯설게 바라보기 위한 장치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 평점을 확인하는 사람. 최적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 그러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멈추는 사람. 어쩌면 그 모든 모습은 이미 우리다. 김아영은 그 익숙한 삶을 낯선 세계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묻는다. 우리는 더 빠르게 이동하는 법은 배웠지만,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여전히 스스로 결정하고 있는가.
글 : 이재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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