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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사라진 것들은 정말 사라진 것일까

박찬경이 무속과 역사, 죽은 자들의 목소리로 다시 묻는 한국의 현재

미디어2026. 08. 12
박찬경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질문이 반복해서 돌아온다.

“우리가 낡았다고 버린 것들 가운데, 사실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있지 않을까.”

그의 작품에는 분단과 냉전이 있고, 무속과 불교가 있다. 전쟁과 국가폭력이 있으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세월호 참사 같은 재난도 들어온다.

처음에는 서로 멀리 떨어진 주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찬경은 그것들을 하나의 시간 위에 겹쳐놓는다.

한국 사회가 빠르게 현대화되는 동안 무엇을 발전이라고 불렀고, 그 과정에서 어떤 기억과 믿음, 어떤 죽음을 뒤편으로 밀어냈는지를 바라보기 위해서다.

초기 작업에서 그는 분단과 냉전을 집요하게 들여다봤다. 특히 한반도의 냉전이 세계사 속 추상적인 냉전과는 다른 구체적인 경험이었다는 문제의식은 이후 작업에서도 중요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다 그의 시선은 무속과 민간신앙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인 작업을 버리고 전통문화로 돌아간 변화라기보다,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 자체가 확장된 것에 가깝다.



[만신]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는 황해도 출신 만신 김금화의 생애를 따라가지만, 한 사람의 전기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무당의 삶을 통과하면서 분단과 전쟁, 피란과 근대화, 그리고 한국 사회가 무속을 바라봐온 편견까지 함께 드러낸다.

박찬경은 [만신]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민족주의자가 아니지만 자신의 문화와 조상, 전통에 자긍심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 태도는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그에게 전통은 박물관 안에 보관해야 할 아름다운 과거가 아니다.

전통은 현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오래된 언어다.

무속은 특히 그렇다.

근대적인 시선에서 무속은 미신으로 밀려나기 쉽다.

하지만 박찬경은 무속이 가진 다른 기능을 바라본다.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을 연결하고, 말하지 못했던 슬픔을 공동체 안으로 가져오며, 떠난 사람을 제대로 보내기 위한 의례를 만드는 기능이다.


[파란만장]에서는 그 세계가 장르영화의 형식과 만난다.

낚시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죽음과 굿이 뒤섞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당시 최신 기기였던 스마트폰으로 촬영됐다는 점이다.

가장 오래된 영적 매개자인 무당과 가장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박찬경은 훗날 이 관계를 설명하면서 스마트폰이 미디어라면 무당은 ‘매개자’라는 말의 오래된 의미를 품은 존재라는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은 여기서 대립하지 않는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박찬경의 감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독특해진다.

그는 비극을 직접 설명하거나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를 둔다.

흑백 화면, 느린 움직임, 정적인 풍경, 의례적인 소리와 반복되는 이미지가 감정을 대신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슬프다는 감정보다 먼저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사람.

끝났다고 생각했던 사건.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

그것들이 화면 뒤편에서 계속 움직인다.



[시민의 숲]은 그 감각이 특히 강한 작품이다.

세 채널로 펼쳐지는 흑백 영상은 전통 산수화의 두루마리처럼 이어지고, 한국 근현대사의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들이 숲속을 지나간다.

작품은 김수영의 시와 오윤의 회화, 민중미술과 민간신앙을 끌어오면서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진혼곡을 만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박찬경은 죽음을 충격적인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자들이 머물 자리를 만든다.

그에게 애도는 과거를 끝내는 일이 아니라, 잊힌 존재를 다시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에 가깝다.

이것은 박찬경 작품에서 발견되는 가장 조용한 공감의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재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이 계속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가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린 것으로 바라보는 것 가운데 하나도 충분한 애도의 시간이다.

과거의 장례와 의례는 복잡하고 길었지만, 그만큼 죽음을 받아들이고 떠난 사람을 보내는 과정도 존재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현대사회에서는 그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작품은 그 사라진 시간을 다시 길게 늘인다.

그래서 박찬경이 무엇을 말하지 않으려 하는지도 중요하다.

그는 전통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무속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한국적인 것이 서구적인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단순한 구분 자체를 의심한다.

근대와 전통.

과학과 미신.

삶과 죽음.

정치와 종교.

박찬경은 그 사이에 선을 긋기보다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바라본다.



[모임]에서 그 질문은 재난 이후의 예술로 확장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나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을 지나온 뒤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는 법과 정치가 정의의 기준을 세우는 것과 달리 종교와 예술에는 현실에서 쉽게 실현되지 않는 희망과 자비의 가능성을 계속 붙잡는 역할이 있을 수 있다고 썼다.

그것은 거창한 구원과는 조금 다르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다시 애도하는 일.

잊힐 것을 알면서도 기억하는 일.

사라진 사람을 다시 불러보는 일이다.

지금 박찬경을 다시 집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기록을 남긴다.

사진도 영상도 뉴스도 끝없이 저장된다.

그런데 기록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기억은 더 빨리 사라지기도 한다.

하나의 참사가 다음 사건으로 밀려나고, 죽음은 숫자가 되며, 애도에는 사회적으로 허용된 시간이 생긴다.

박찬경의 작업은 그 속도에 저항한다.

그는 지나간 사건을 다시 꺼내고, 이름 없는 죽음 앞에 오래 머물며, 우리가 미신이라고 밀어냈던 의례를 통해 현대사회가 잃어버린 감각을 다시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유령은 무서운 존재만은 아니다.

유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가 있고,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죽음이 있으며, 아직 대답하지 못한 질문이 있다는 표시다.

박찬경은 그것들을 쫓아내지 않는다.

조용히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곳으로 가기 위해, 너무 많은 과거를 버리고 온 것은 아닐까.

“결국 내 작업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 박찬경, 작품 세계에 관한 인터뷰 취지

글  :  미디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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