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영화감독 허진호가 사랑과 관계의 끝에서 오래 바라봐온 인간의 마음
허진호의 영화를 오래 보고 있으면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사람의 마음은 왜 변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의 영화에서 사랑은 영원한 약속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사랑은 찾아오고, 머물고, 달라진다. 때로는 죽음 때문에 끝나고, 때로는 아무런 결정적인 사건 없이 사라진다. 허진호는 바로 그 시간을 찍어왔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과 다림의 관계에는 거대한 사건이 없다. 사진관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하지만 정원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은 완성되기 전에 이별을 품는다. 흥미로운 것은 허진호가 그 슬픔을 크게 밀어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음을 앞둔 남자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카메라는 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사진관의 오후, 오가는 사람들, 작은 미소와 짧은 대화 같은 일상을 바라본다. 죽음조차 삶의 한가운데 놓아둔다. 그래서 슬픔은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했던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허진호에게 감정은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에 가깝다.


이 태도는 [봄날은 간다]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상우와 은수의 사랑은 특별한 이유 없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러 다니며 가까워진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 흐르는 물, 눈이 쌓이는 소리. 영화는 사람의 말만큼이나 자연의 소리를 오래 듣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은수의 마음이 멀어진다. 여기에서도 허진호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누가 잘못했는지 판결하지도 않는다. 사랑이 시작될 때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듯, 끝나는 마음 역시 하나의 이유로 정리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상우의 질문은 오래 남는다. 그 문장은 사랑이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과, 이미 변해버렸다는 현실 사이에서 나온다. 어쩌면 허진호가 바라보는 인간은 바로 그 사이에 있는 존재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끝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번 더 돌아보는 사람. 그의 영화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절제는 감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감정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대사보다 표정을 믿고, 사건보다 시간을 믿는다. 무엇보다 관객이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둔다. [봄날은 간다]가 자연의 소리와 계절의 변화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관계의 흔들림을 전달한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도 그래서다.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듯, 봄이 지나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사랑 역시 그렇다. 변했다는 사실보다 더 아픈 것은, 그 변화를 아무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허진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공감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는 상처받은 사람에게 삶의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시 사랑하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손쉬운 문장도 꺼내지 않는다. 대신 시간이 실제로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계절이 바뀌고, 사람은 다시 밥을 먹고, 일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상처가 사라졌다는 선언 없이도 삶은 계속된다. 그 조용한 지속이 그의 영화가 가진 독특한 온도다.


최근의 [보통의 가족]에서는 그 시선이 사랑에서 윤리로 이동한다. 자녀들이 저지른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부모들은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와 현실 사이에서 흔들린다. 허진호는 이 작품을 연출하며 인물들의 ‘이중성’을 끌어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겉으로 확고해 보였던 신념이 자신의 가족이라는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 사람은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을 한다. 초기의 허진호가 “사랑은 변하는가”를 물었다면, 이제 그의 질문은 조금 더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신념도 변하는가.” “우리가 믿고 있던 자신의 모습은 정말 진짜인가.” 그러나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인물을 쉽게 심판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알려주기보다 선택 앞에서 흔들리는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어쩌면 ‘정답’이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고, 관계에도 정답이 없으며, 인간의 선택조차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허진호의 영화는 항상 조금 부족하게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바로 그 미완성이 삶과 닮았다. 지금 허진호를 다시 집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정이 빠르게 명명되고 관계가 쉽게 규정되는 시대다. 사랑은 성공과 실패로 나뉘고, 사람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된다. 허진호의 영화는 그 사이에 머문다. 사랑했지만 헤어질 수 있고, 옳다고 믿었던 사람이 흔들릴 수도 있으며, 한 사람 안에 모순된 마음이 함께 존재할 수도 있다고 바라본다. 그 복잡함을 제거하지 않는 것. 그것이 허진호가 오랫동안 영화를 통해 지켜온 인간에 대한 예의인지도 모른다. 허진호의 영화는 사랑이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했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준다. 사람은 떠나고 계절은 지나간다. 하지만 어떤 목소리와 표정, 어느 날의 공기와 소리는 기억에 남는다. 그것이 우리가 관계를 지나온 흔적이다. 허진호는 그 흔적을 붙잡는다. 아주 조용하게. 그래서 그의 영화가 끝난 뒤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때 분명히 존재했던 마음의 온도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