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장르를 바꾸면서도 인간의 모순을 놓치지 않는 김지운의 영화
김지운의 영화를 하나의 장르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조용한 가족]의 블랙코미디에서 [장화, 홍련]의 공포로,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웨스턴으로, 다시 [악마를 보았다]의 복수극과 [밀정]의 시대극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장르가 계속 바뀌는데도 이상하게 김지운의 영화라는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질문과 만나게 된다. “왜 삶은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가.” 김지운은 실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을 이어주는 요소로 ‘아이러니’를 꼽았다. 원하는 것과 실제 벌어지는 일이 어긋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부족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을 만들어내는 삶의 아이러니에 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그의 영화 위에 놓으면 많은 장면이 다시 보인다.


[조용한 가족]에서는 잘해보려는 선택이 계속 더 큰 사고를 만들고, [장화, 홍련]에서는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더 끈질기게 인간을 붙잡는다. [달콤한 인생]의 선우는 단 한 번의 판단으로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 전체와 충돌한다. 특히 [달콤한 인생]은 김지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작품이다. 영화는 매우 아름답다. 정돈된 공간과 빛, 검은 정장, 음악, 절제된 동작. 폭력조차 하나의 안무처럼 정교하게 배치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처절하다. 사소한 의심과 자존심,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여기서 김지운의 미장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비극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의 영화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 역시 이와 닮았다. 감정을 처음부터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한동안 누르고, 감추고, 정돈한다. 그러다가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도착했을 때 한꺼번에 폭발시킨다. 그래서 김지운의 영화에는 침묵과 폭력이 이상할 만큼 가까이 있다. 조용한 장면 다음에 잔혹한 장면이 오고, 웃음 뒤에 공포가 따라온다. 그는 코미디는 부조리, 누아르는 파괴, 공포와 스릴러는 불안이라는 식으로 장르마다 고유하게 다룰 수 있는 정서와 주제가 있다고 설명해왔다. 김지운에게 장르는 이야기를 가두는 규칙이 아니라 인간의 특정 감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꺼내기 위한 형식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장르인가’보다 ‘이 장르를 통해 인간의 무엇을 보고 있는가’다.


[악마를 보았다]가 대표적이다. 표면적으로는 복수극이다. 그러나 복수가 반복될수록 정의와 악의 경계는 흐려진다. 악인을 응징하기 위해 잔혹해진 인간은 과연 처음의 자신과 같은 사람인가. 김지운은 쉽게 답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바로 그 정답인지 모른다. 누가 옳은지, 어떤 삶이 정답인지, 관객이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를 감독이 대신 결정하지 않는다. 대신 장면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리고 관객을 그 불편한 감정 앞에 남겨둔다. 그의 영화에서 공감이 발생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인생의 결정적인 사건이 반드시 거대한 이유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상대의 마음을 잘못 이해해서. 자존심 때문에 돌아서서. 한 번의 선택을 되돌리지 못해서. 우리의 삶 역시 그렇게 조금씩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김지운의 인물들은 운명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만들어낸 아이러니 속을 걸어간다.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는 일은 묘하게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된다.


그리고 [거미집]에 이르면 그 질문은 영화 자체를 향한다. 영화 속 감독 김열은 이미 촬영을 끝낸 작품의 결말을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배우와 제작자, 검열과 현장은 모두 그를 방해한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카메라를 돌린다. 김지운은 [거미집]을 이야기하며 영화가 무엇인지 다시 정의하고 생각해봐야 할 시기라고 느꼈고, 자신 역시 그런 질문을 고민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오랫동안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든 감독이 결국 다시 ‘왜 영화를 만드는가’라는 가장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 셈이기 때문이다. 지금 김지운을 다시 집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콘텐츠가 빠르게 제작되고 소비되는 시대다. 이야기는 점점 더 명확한 설명을 요구받고, 장르는 익숙한 공식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김지운은 여전히 장르를 가지고 논다. 공포를 아름답게 만들고, 폭력을 우아하게 만들며, 비극 속에 웃음을 집어넣는다. 그 충돌 때문에 우리는 익숙한 감정을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김지운이 오래도록 찍어온 것은 공포도, 누아르도, 액션도 아닐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실제 삶 사이에서 계속 어긋나는 사람들. 사랑하면서 상처를 주고, 복수하면서 스스로 파괴되고, 완벽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람들. 그 모순된 인간을 그는 아름다운 화면 속에 계속 세워왔다. 그래서 김지운의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장르의 쾌감만이 아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얼굴을 알고 있다. 우리 역시 그런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