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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자신을 버릴 수 있을까. 《클라이맥스》는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한 남자의 욕망을 통해 성공과 야망, 사랑과 배신 사이에서 인간이 끝내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사람은 얼마나 높은 곳에 올라가야 만족할 수 있을까. 좋은 직장을 얻으면 더 높은 자리를 원하고, 돈을 벌면 더 많은 돈을 원한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시작했던 경쟁이 어느 순간 남보다 위에 서기 위한 싸움으로 변한다.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는 그 성공의 이면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면, 그곳에 도착한 나는 여전히 내가 원했던 사람일까.

주지훈이 연기하는 방태섭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 검사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검찰 조직은 능력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정한 세계가 아니었다. 돈과 배경, 인맥이 사람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현실 앞에서 태섭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그가 손을 잡은 사람은 하지원이 연기하는 톱배우 추상아다. 두 사람의 결혼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태섭에게 상아는 자신을 권력의 중심으로 이끌어줄 사람이었고, 상아에게 태섭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함께하기로 한다. 이 관계가 흥미로운 이유는 결혼이라는 가장 사적인 선택이 성공을 위한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과 이해관계를 반대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면 계산하지 않아야 하고, 진심이라면 조건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정감을 원하고, 함께 살아갈 경제적인 조건을 생각하며, 서로의 사회적 위치가 관계에 미칠 영향까지 고민한다. 문제는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상대방을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마음보다 그 사람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이익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클라이맥스》의 태섭과 상아는 바로 그 경계에 서 있다. 하지원은 인터뷰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사랑보다 이해관계에 가까운 것으로 해석했다고 밝혔다. 반면 주지훈은 태섭이 상아를 성공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맞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형성된 전우애 역시 사랑의 한 형태라고 바라봤다.  같은 관계를 연기한 두 배우가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작품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이용할 수도 있고, 필요해서 시작한 관계에서 진심이 생겨날 수도 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그 사람이 떠나는 것은 두려워할 수 있다. 사랑과 욕망은 언제나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감정이 복잡하다는 사실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사랑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이용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며, 함께 성공하고 싶었다는 이유로 상대의 삶을 자신의 계획에 포함시켜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관계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서로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관계의 중심에는 두려움이 있다. 태섭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할까 두렵다. 상아는 화려했던 자신이 잊히고 초라해지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서로 다른 욕망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같다.

지금의 자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불안이다. 이 불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도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고,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할 것 같다. SNS에서는 누군가의 성공이 끊임없이 보이고, 우리는 자신의 평범한 하루를 타인의 가장 화려한 순간과 비교한다. 그렇게 성공은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시험이 된다. 문제는 그 시험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한 번 인정받으면 다음 인정이 필요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그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진다. 결국 성공을 향한 욕망이 삶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클라이맥스》가 그리는 권력의 세계는 이런 불안이 극단적으로 확대된 공간이다. 정치계와 재계, 연예계가 연결된 세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욕망을 위해 정보를 거래하고 관계를 이용한다. 나나가 연기하는 황정원은 권력자들의 비밀을 쥔 인물로, 차주영의 이양미와 오정세의 권종욱은 거대 기업의 권력을 둘러싸고 충돌한다.  이들에게 정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한 무기가 된다. 누군가의 약점이 나의 기회가 되고, 누군가의 추락이 나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가다. 그러나 작품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마냥 행복하게 그리지 않는다.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지켜야 할 것도 많아지고,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도 늘어난다. 그래서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마음은 불안해진다. 우리는 성공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많아지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의 인물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의식하고, 더 많은 비밀을 감추며, 더 많은 관계를 계산한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다, 정작 자신의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작품의 제목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클라이맥스는 이야기에서 가장 높은 긴장과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을 뜻한다. 하지만 인생에도 반드시 하나의 절정이 존재할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성공 장면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처럼 생각한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순간,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는 순간,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순간. 그 순간에 도착하면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인생은 영화처럼 절정에 도착했다고 끝나지 않는다. 승진한 다음 날에도 출근해야 하고, 목표를 이룬 다음에도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성공한 사람 역시 관계에서 상처받고, 미래를 걱정하며,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 고민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생의 가장 높은 순간을 만드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추상아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한때 최고의 배우였던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자리가 흔들리는 현실을 마주한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인기가 떨어지는 일이 아니다. 배우라는 이름으로 쌓아온 자신의 가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전성기가 지났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물러났다고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전만큼 주목받지 못한다고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룬 성취는 우리의 일부일 뿐, 우리 자신 전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클라이맥스》를 단순한 권력 누아르가 아닌 인간의 불안에 관한 이야기로 읽게 만드는 이유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한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고, 더 나은 삶을 원한다. 그 마음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다만 성공을 위해 달리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잊어버린다면, 그 성공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태섭의 욕망은 우리에게 질문을 남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가장 소중했던 사람과 자신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을 정말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절정은 남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 지금의 나로도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성공이라는 이름의 끝없는 경쟁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진짜 성공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