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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

『소년이 온다』가 끝까지 붙잡고 있는 침묵의 윤리

이재혁2026. 01. 14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는 동안 독자는 여러 번 멈추게 된다. 문장이 어렵거나 이야기가 복잡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 적게 말해져서, 그 적음 속에 담긴 감정이 한 번에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강은 이 소설에서 사건을 재현하기보다, 사건 이후에 남겨진 감각을 천천히 호출한다. 그래서 『소년이 온다』는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이후에도 무엇이 끝나지 않았는가”를 묻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세계관은 극도로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이다. 총성과 명령, 피와 시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배경처럼 물러나 있다. 대신 전면에 놓이는 것은 침묵, 망설임, 말을 삼킨 시간들이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말하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아서, 혹은 말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이 소설의 세계는 ‘증언할 수 없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소년이 온다』가 다루는 폭력은 단지 국가 권력의 물리적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언어를 빼앗고, 기억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에서 살아 있는 인물들조차 어딘가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머무는 이유다. 동호라는 소년은 그래서 하나의 인물이라기보다, 말해지지 못한 수많은 존재들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이 지닌 가치관은 분명하지만, 결코 선언적이지 않다. 한강은 독자에게 정의를 외치지 않고, 분노를 지시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소년이 온다』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어떤 기억은 온전히 전달될 수 없으며,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존엄에 가깝다고 말하는 듯하다.

철학적으로 이 소설은 ‘기억의 윤리’를 다룬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태도를 선택하는 일이다.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신, 쉽게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 함부로 요약하지 않고, 고통을 하나의 서사로 소비하지 않는 것. 『소년이 온다』는 그 조심스러움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읽는 이는 관찰자가 아니라, 침묵을 함께 견뎌야 하는 자리로 불려온다.

이 소설이 건네는 위로는 아주 낮은 온도로 존재한다. 괜찮아질 거라는 약속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도 없다. 다만 “당신이 느낀 그 고통은 과장되지 않았다”는 암묵적인 승인만이 남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감정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대신 마음 한쪽에 오래 남아, 우리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떤 자세로 서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되묻게 한다.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읽는 순간보다 읽은 이후에 더 깊어지는 소설이다.


당신에게도 아직 말로 옮기지 못한 기억 하나가,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나요?

글  :  이재혁 에디터

admin@use9.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