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
바틀비가 멈춰 선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계속하고 있을까
그 다짐이 오래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 말을 하지 않으면 마치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면 마음이 잠시 멈춘다. 이 소설에는 다짐도, 성장도, 극적인 변화도 없다. 대신 한 사람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끝까지 멈춰 서 있을 뿐이다. 바틀비는 월가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필경사다. 처음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다. 말이 없고, 불평도 없고,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낸다. 그러다 어느 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는 화를 내지 않는다.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반복할 뿐이다. 서류 검토도, 심부름도, 대화도, 심지어 퇴근조차도. 이 문장이 이상한 이유는, 너무 공손하기 때문이다. 거절인데 공격이 없고, 저항인데 폭발이 없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더 곤란하게 만든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이해하려 애쓴다. 참아보기도 하고,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바틀비는 끝내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고장 나지 않는다. 대신, 작동 자체를 멈춘다. 이 소설의 세계는 분명하다. 사람은 역할로 존재하고, 기능으로 평가받는다. 일하지 않는 존재는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 곧 배제된다. 바틀비는 그 질서 한가운데서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 아무 말도 외치지 않은 채 그 질서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불편하다. 바틀비가 너무 극단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태도가 우리와 아주 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해야 할 일’에 응답하며 산다. 원해서라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설명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가끔은 그저 멈추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필경사 바틀비』는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이 정말 무책임한 걸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오래 쉬지 않고 달려온 걸까. 어쩌면 바틀비는 실패한 인간이 아니라, 끝내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로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글 : 이재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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